우쓰미 아이코 와세다대학원 객원교수는 강제연행이나 조선인 학살 문제를 먼저 파헤친 것은 재일 학자들이라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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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⑤ 우쓰미 아이코
우쓰미 아이코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문제의 전문가다. 1970년대 20대 후반의 나이에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일제 때 징집됐던 한 조선 청년의 기막힌 삶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전기가 됐다. 인도네시아에 배치됐던 조선인 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 항복 후 현지인 독립운동 세력에 가담해 네덜란드군과 싸우다 처형당했다. 그중에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돼 뒤늦게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히게 된 조선인이 있었는데. 주자카르타 주재 일본대사관이 이 조선인의 뒤처리에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분개한 우쓰미는 그의 본명이 양칠성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78년 가족이 살고 있는 전북 완주 삼례로 찾아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알렸다.(<한겨레> 2008년 12월19일치 참조) 그는 긴 세월 이 문제를 파고들어 적지 않은 저서와 자료집을 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아직 이 분야의 전문가가 드러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30여년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지난해 11월2일 도쿄에서 만난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하느라고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 시간차가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 자신도 비시급 전범들을 연구할 초기에는 책으로 내줄 출판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 제국의 협력자들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 전문가
인니 독립영웅 양칠성 밝혀내 전후의 국내외 정세나 냉전체제에 휘둘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문제가 비시급 전범 말고도 여러 개 있다. 사할린 잔류동포나 시베리아 억류 문제도 그중의 하나다. 우쓰미는 일본의 평화운동이 전후 빠져든 독특한 구조 속에서 시민운동가들도 이런 문제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냉전체제의 틈이 벌어지면서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의 공개, 전문 연구자들의 등장이 맞아떨어지면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거시적 질문에서 시작하자. 강제병합이 100년 전의 일인데도 두 나라의 갈등은 여전하고 역사 청산도 이뤄지지 않았다. 어디에서 이유를 찾아야 하나? “패전 후 일본에 점령군이 들어와 민주개혁을 하고 도쿄군사재판을 열었다. 재판이 끝나자 전쟁 문제는 일단락됐고 전범들도 이제 청산됐다는 풍조가 생겼다. 어느 의미에서 자기긍정 의식이 일본 사회에 생긴 것이다. 또 도쿄 재판 과정에서 식민지 문제가 완전히 빠져 버렸다.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는 전후 자국 식민지에 복귀하려고 했기 때문에 식민지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이나 대만 등 옛 식민지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을 왜곡시켰다.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⑤ 우쓰미 아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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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냉전 업고 과거침략 정당화 -전후 일본의 역사교육은 어떠했나? “나는 전후교육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민주교육을 받고 자랐다. 미국과의 관계는 많이 배웠지만 학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전쟁과 아시아와의 관계다. 분한 일이지만, 조선인·중국인의 강제연행을 전혀 몰랐다. 당시에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문제도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다. 그런 역사를 배우고 자란 사람이 아시아와의 관계를 잘할 수가 없다. 당시 일본 역사 연구는 메이지유신 정도에서 끝났다.” -그런 배경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근현대사는 연구자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역사학계의 방식은 문서자료가 공개되면 그것을 검증해서 역사를 쓴다는 것이다. 자료가 다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자의 증언만으로 근현대사를 쓴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식이 강했다. 연구를 하려 해도 취직이 안 됐기 때문에 도쿄대학 같은 곳에서 근현대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도 겨우 쇼와 초기가 연구 대상이었다. 현대사 전공 1호 교수라고 해도 좋을 선생이 <도쿄재판으로의 길>을 쓴 아와야 겐타로(1944년생) 정도다.” -일본의 평화 시민운동은 사할린 잔류 동포나 시베리아 억류 문제 등에 오랜 기간 냉담했다. 무슨 연유가 있는 건가? “전후 평화운동은 미국의 원폭 투하에 따른 피해의식에서 사회당·공산당 주도로 전개됐다. 그런 노선에 올라타서 쭉 가버렸기 때문에 소련이 좋고 미국은 나쁘다는 식의 이미지가 고착됐다. 그래서 평화운동의 활동가들은 사할린에 방치된 조선인들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호소하면 ‘왜 군사독재정권에 가나’ 하고 받아들였다. 시베리아 억류 문제도 당사자들이 반공 입장에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 거의 이해하지를 못했다. 조선인 비시급 전범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면 왜 전범을 비호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풍조에 큰 변화가 온 것은 역시 냉전이 붕괴된 이후다. 나의 체험에서 얘기하면, 사회당도 공산당도 아니고 자신의 머리로 독자적으로 식민지 전쟁의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고민은 60년대에 생겨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한·중 제외돼 역사청산 못해 -한반도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 “평화운동 진보진영에서 보면 60년대 이전 조선과의 관계는 일조협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북과 가까웠고 한국을 지칭할 때는 항상 괄호 안에 남조선이라 썼다. 일본인이 조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성 아래 1961년 ‘일본조선연구소’가 설립된 것은 상징적이다. 나는 당시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70년에 들어갔지만, 연구소 이름 앞에 일본을 붙인 것이 의미가 있다고 들었다. 연구소에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독자적으로 판단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당시만 해도 조선 관련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 문제가 발생하면 총련이나 민단에서 소수의 일본인들을 접대하며 도와달라고 했다. 이런 모임을 흔히 ‘야키니쿠 회합’ 이라고 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연구자들은 총련이나 민단이 주최하는 파티에는 일체 가지 않았다. 가게 되면 의무감이 생겨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일한 사람이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인데 아깝게도 일찍 죽었다. 독자적 운동방식을 고수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지무라는 ‘예스맨’이 아니어서 일본인뿐만 아니라 민단·총련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 -한국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은 어떻게 굳어졌나? “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이 분단됐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인상은 두 가지 있다. 이승만 라인을 넘었다고 계속 나포되는 일본 어선, 일본의 암시장을 지배하는 ‘제3국인’ 이라는 이미지다. 거기에 한국전쟁이 겹친다. 그래서 특히 시민운동 쪽에서는 한국 민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 환상 속에서 남쪽은 엉망이지만 북쪽은 좋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귀국운동(북송사업)으로 이어졌다. 내가 한국에도 우리와 같은 민중이 있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이 4·19혁명이다. 대학 1학년 때라 잘 기억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본의 운동 쪽에 큰 충격이었다. 4·19는 1960년 일본의 6·15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65년 한일조약 체결 때 일본에서도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주로 군사동맹 반대가 이유였다. 식민지 청산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거의 인식되지 않았다. 지금도 말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당시 구호의 하나가 ‘보쿠니 야루노와 보쿠니 구레’였다.(성씨 ‘박’의 일본어 발음은 ‘나’라는 뜻의 보쿠와 같다. 박에게 줄 것은 나에게 달라는 뜻) 유·무상 합쳐 5억달러가 식민지 지배 청산이 아니라 박정희에게 5억을 갖다 바친다는 것으로 인식됐다.” 남한 4·19 민주주의 운동 충격
일본의 6·15 안보투쟁에 영향 -3국인이란 말은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육상자위대 기지에서 한 연설에서 사용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었나? “당사자 아닌 3자라는 의미에서 원래는 중립적 말이다. 전후 점령군 사령부가 일본 정부에 각서나 지령을 보내 통치를 하는데, 일본 거주 조선인·대만인은 일본인도 아니고 연합국인도 아니니 제3의 범주로 사용했다. 이들 조선인·대만인의 법적 지위는 대단히 불안정했다. 특히 대만인은 중국이 전승국이었으니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법적 지위가 일시적으로 역전됐다. 그것이 감정적 굴절을 일으켜 앙금으로 남았다. 보통 일본인들의 감정으로는 이제까지 자신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우위에 올라선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예전에는 길에서 마주치면 머리를 조아리며 피해갔는데 이제는 피하지 않을뿐더러 뻣뻣하게 나오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연합국의 점령 기간 중 조선인·대만인들에 대해 한동안 경찰당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당시 국회 속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이 멋대로 설치는데 왜 단속을 제대로 못하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온다. 원래 조선인(조센진)이라는 말은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주간지가 마약 거래 등 범법행위자를 기사로 다룰 때 말썽이 나지 않을 3국인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러면서 대단히 부정적 이미지로 바뀌었다.” -전후 보상운동에 오랜 기간 관여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운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다시 묻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80년대에 들어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들을 불러 증언을 듣는 집회를 열었다.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인들은 그런 집회를 통해 전혀 몰랐던 것을 깨쳤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인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나서 ‘아니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적이 있었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해자로서의 책임’ ‘전후 책임’ ‘전후 보상’이라는 용어가 매스컴을 통해 일반화됐다.”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
한국 정부와 협력 중요 사례 -전후 청산과 관련해 일본은 독일과 비교해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흔히 얘기되는데…. “독일에서 보상운동 하는 활동가들에게 들으면 반대로 얘기를 한다. 독일에서 일반 시민들이 자기 책임 아래 보상운동, 청산운동을 하는 것은 없다. 독일 정부가 보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빠진 구석이 많다. 시민운동으로 따지면 일본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제 피해 희생자들에 대한 본격적 조사는 노무현 정권 때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시작됐다. 개별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이 앞서 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도 않다. 개인적 얘기를 하면 70년대 결혼하고 나서 시어머니에게 간토대지진 때의 기억을 들은 적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놓고 습격해 온다고 난리였다고 말했다. 그것을 아직 믿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거짓말이라구?’라고 반문하더라. 전후 그때까지 시어머니의 의식을 바꿀 역사 연구가 없었다.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처음 쓴 것이 강덕상 교수의 책이다.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박경식 선생의 책이 처음이다.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역사적 자료를 통해 본격적인 책을 낸 것은 재일동포 학자들이다. 결국 일본인들은 제각기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 일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은 자신들의 문제이니까 필사적으로 연구해 일본 사회에 던진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오랜 기간 빠질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다.”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의 공동대표도 맡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나? “징병, 징용 등으로 강제연행돼 희생된 사람이 있으면 유족들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최저 의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나서서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한국인 유족들이 끈질기게 문의를 해 군력증명서 같은 문서를 받더라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시민의 힘으로 하자고 뜻을 모아 각 지역의 시민단체나 연구자들이 결합해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우리는 후생노동성에 직접 자료를 요청할 수는 없지만, 유족의 위임장이 있으면 대신 조회가 가능하다. 한국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와도 긴밀하게 협조를 하고 있다.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의 의뢰가 있으면 우리의 지혜를 모아 답변을 한다.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 작업과 일본의 시민운동이 협조하는 중요한 사례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 특히 후생노동성의 소극적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인 문제 언론에 언급하면
우익, 새벽에 전화로 살해협박 -2000년 도쿄에서 군대위안부 관련 국제민간법정을 여는 데 깊이 관여했다. 우익으로부터 직접 위협을 받지 않았나? “직접 받은 것은 아마도 민간법정 개최를 주도한 마쓰이 야요리(1934~2002.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시민운동가)일 것이다. 요즘 우익들은 개인보다는 그런 행사를 보도한 아사히신문이나 엔에이치케이(NHK) 같은 언론매체를 찾아다니며 위세를 부린다. 이전에 조선인 차별 문제나 야스쿠니신사 합사 등에 관해 언론기관에 논평을 하면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거나 우편물이 배달되곤 했다. 우익들은 새벽 4시에도 전화를 걸어 죽여버리겠다,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대응을 하나? “남편이 전화를 받는 경우가 많다. 전화를 끊어도 계속 걸려와 남편이 영어로 말을 하니까 중단된 적도 있다.” (웃음) -마쓰이 야요리와 함께 아시아 여성들의 차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여 왔다. 학자와 사회활동가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나? “나를 학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나와 교사 할 때도 학자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70년 일본조선연구소에서 일할 때는 학자, 운동가 구별 없이 했다. 운동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운동했다고 할까? 전후 일본의 민법이 개정돼 여성 차별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민감했다. 60년대 대학에서 안보투쟁을 할 때도 조선인 차별, 민족 차별은 잘 몰랐다. 우리가 여성의 평등을 주장한다면 민족 차별과 식민지 문제도 함께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부 끝> 도쿄/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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