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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03 20:59 수정 : 2010.01.04 07:59

우방문고에 보관돼 있는 조선총독부 관계자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들.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가큐슈인(학습원)대학은 이제 사립대학의 하나일 뿐이지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 전까지는 왕실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역대 원장 가운데는 명성황후 시해의 주역인 미우라 고로, 러일전쟁 때 육군을 이끈 노기 마레스케도 있다.

이 대학 부설 동양문화연구소에 있는 우방문고란 이름은 우방협회에서 왔다. 우방협회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중앙일한협회의 자매단체다. 중앙일한협회가 내건 목적은 두 나라의 친선에 기여하고 국민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를 심화시키며 문화 교류와 경제 제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표방한 목적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 협회의 뿌리는 1926년 조선총독부의 후원단체로 출발한 중앙조선협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자 총독부의 관료들을 비롯해 유관단체 기업의 간부들은 서둘러 보따리를 싸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패전 직후 조선에서 철수한 일본인들의 지원대책 마련과 ‘재외자산’ 보장을 위한 단체를 결성했다. 1947년 동화협회로 이름을 바꿨고 1952년 중앙일한협회로 다시 명칭을 변경했다. 일본 정부에 한반도 정책에 관한 자문을 하거나 60년대의 한-일 협상 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우방문고에는 조선·만주·몽골 관련 도서와 자료 등 5700여종이 보관돼 있다. 3.1운동 관련 자료인 사카타니 문서, 총독부 농림국장·전북지사를 지낸 와타나베 시노부가 농업 관련 자료를 모은 와타나베 문서가 눈길을 끌지만, 총독부 전직 관리들의 육성 녹음자료가 오픈릴 테이프로 480개 있다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58년 5월부터 72년 4월까지 식민지 관계자들의 모임이 녹음돼 있는데 특히 가치가 있는 것은 근대사료연구회의 세미나 녹음이다.

그중에서도 식민지 관료 출신과 재일동포를 포함한 젊은 연구자들이 기탄없이 질의응답을 벌인 58년부터 62년 사이의 기록이 의미가 있다. 다나카 다케오 등 정무총감 3명을 비롯해 관료 30여명, 단체 기업 관계자 80여명이 강사로 나와 연구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패전 때 총독부 관련 문서가 많이 폐기됐기 때문에 녹음 기록은 정책의 배경이나 입안 과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8·15해방 때 황해도 지사였던 쓰쓰이 다케오는 36년부터 39년까지 함경북도 경찰부장으로 재직하던 때를 회고하며 “적화가 심한 지역이어서 심혈을 기울여 사상정화랄까 적화단속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백두산 쪽에서 김일성이 돌아다니며 국경을 침범했다. 꽤 습격을 당했고 작전에 말려들어 경찰이 당했다”고 증언했다.


사카타니 문서의 일부로 3·1운동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담겨 있는 <조선문제 잡찬>.
녹음자료를 포함한 식민지 자료들이 가큐슈인대학에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의 사후에 우방협회가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 이 자료들은 사무실이나 창고에 방치돼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자료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중앙일한협회는 83년 가큐슈인과 자료 기탁 계약을 맺고 94년에는 녹음자료도 기탁 대상에 포함했다. 호즈미의 사후 우방협회 이사장이 된 미즈타 나오마사(1897~1985)는 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 전후 가큐슈인의 이사를 겸했다. 미즈타는 평소 총독부 예산은 전부 자기 손을 거쳤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런 인맥이 자료 이관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중반 미야타 세쓰코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쇼와사연구소가 96년부터 녹음테이프의 일부를 시디로 녹음해 내용을 회보에 소개했다. 쇼와사연구소는 침략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미화하고 우익 역사교과서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간단체다. 새로운 우익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인사가 중앙일한협회에 이사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미야타는 녹음테이프의 내용이 거두절미돼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자료로 쓰이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단 한권이라도 좋으니 토론 내용에 해설과 상세한 주를 달아 활자화하자고 가쿠슈인에 제의했다. 이런 자료가 있다는 것이 연구자나 학계에 널리 알려지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정무총감 3명의 녹음기록을 정리해 동양문화연구소가 내는 학술지 <동양문화연구> 2호(2000년 3월)에 실었다. 중앙일한협회 쪽에서 설사 불만을 제기하더라도 전부 회수하지는 못하리는 계산도 했다.

이 학술지가 나오자 생각보다 반향이 컸다. 2002년 한·일 월드컵경기를 앞두고 한국 특별취재반을 운영하던 아사히신문에서 기자가 찾아와 취재를 하더니 2000년 8월 미공개 녹음자료가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러자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던 대학의 태도가 확 달라져 자료를 정식으로 사들였다. 이후 녹음자료는 1년에 한 번 나오는 동양문화연구에 계속 실리고 있다. 녹음테이프를 시디나 미니디스크 등 디지털 음원에 옮기는 작업도 거의 마무리됐다.

도쿄/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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