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로 숨진 고 이성수씨의 부인 권명숙(뒤)씨가 지난 18일 오후 경기 용인시 수지삼성병원에서 입원중인 둘째아들 이상현군의 휠체어를 밀며 병실 복도를 걷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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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사람들] ① 용산참사로 아버지 잃은 이상현 군
“빈소가 집이 돼버린 1년 낮엔 학교, 밤엔 집회…
싸우며 버틴 엄마도 있는데 힘들지만 대학서 꿈 키워야죠”
아들이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대학 안 가면 안 돼? 대학 가면 엄마 혼자 힘들잖아?” 올해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첫아들이 진학의 꿈을 접고 군대에 갔는데, 둘째까지 포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엄마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 권명숙(47)씨와 친척들은 6개월 동안 둘째를 설득했다. 이상현(18)군은 결국 고집을 꺾었고, 올해 경기 성남시의 ㅅ대 색채디자인과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했다. 엄마는 친척들에게 받았거나 여기저기서 들어온 성금을 모아 첫 학기 등록금 450만원을 어렵사리 마련했다.
상현군은 뜻밖에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지난 18일 낮 경기 용인 수지삼성병원에서 만난 상현군은 깁스를 한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바로 전날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면서 발목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한참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을 또래들과 달리, 상현군은 많이 지쳐 보였다. 해가 바뀌고 조금 지나면 그 일이 벌써 1년이 된다. 지난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옥상의 망루에 올라갔던 아버지(이성수씨)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뜬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상현군은 그날 용인 집 근처의 피시방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아빠 소식을 들었다. 곧장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다.
‘용산참사’로 가장을 잃은 다섯 가족은 빈소에서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수원 ㅂ고등학교까지 등하교를 하며, 저녁에는 매일 집회에 나가 진압 경찰들과 싸웠다. 형은 경찰 방패에 맞아 이마가 찢어졌다. 손에 든 아버지 영정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었다.
“병원 영안실은 넓고 깨끗했지만 참 싫었어요. 다섯 가족이 큰 방에 함께 살다 보니 사생활도 없고…. 그냥 텔레비전을 켜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였어요.”
유족들이 지난 9월 병원생활을 접고 참사현장에 터를 잡으면서, 상현군은 수원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옮겼다. 영안실에서 함께 지내던 다른 유족의 형·동생들과도 헤어졌다.
참사로 5명의 가장이 세상을 떠난 다섯 가족에겐 모두 11명의 아들·손자가 있었다.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장이던 이상림씨의 아들 이충연(36)씨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채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고, 이상림씨의 손자는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다. 요리사였던 양회성씨의 아들들은 다시 일을 나가고, 윤용헌씨의 큰아들은 대학 2학년이 된다. 한대성씨의 큰아들은 내년 봄 제대를 앞두고 있다.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나누지만, 따로 만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원래 용인에서 가구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다 5년 전 사업이 망하면서 여름엔 강냉이, 겨울엔 군밤을 파는 노점상이 됐다. 용인 토박이라 행인들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빠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사고 전 활달한 성격의 상현군은 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만화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자라면서는 옷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배워 나중에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했다. 용인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지난해 신봉동의 집이 철거되고, 쫓기고 쫓겨 인근에 천막을 쳐놓고 살게 됐다. 집이 철거되자 아빠는 생계가 걸린 군밤 손수레를 세워두고 다른 일에 소매를 걷었다. 빨간색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른 채. 참사가 일어나기 1주일 전 온 가족이 모처럼 외식을 함께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빠는 그 뒤로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1월20일 아침, 아빠는 망루에 있었다. 지난 1년을 싸우고 버티며 엄마는 아들에게 항상 말했다. “우리가 살던 용인에서 너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 네가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게 아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야.” 엄마는 그렇게 낮에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밤에는 자식을 보며 눈물지었다. 돈이 없어 친구들을 따라 미술학원에 간 아들이 갖은 눈치 보며 어깨너머로 그림 배우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곤 했던 엄마였다. 아들은 “아빠 일이 묻혀질까봐 정말 두렵다”고 했다. 참사 직후 반짝하던 세상의 관심이 사그라들고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줄어들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엄마와 상현군은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어제가 반복되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같은 얘기를 또 물어봤다. 이제 곧 대학생이 될 아들은 인터넷 쇼핑몰이라도 열어 돈을 벌겠다며 엄마를 위로한다. 엄마는, 너무 일찍 어른이 돼버린 아들에게 차분히 공부를 하라며 달래고 있다. 용인/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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