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17 19:40
수정 : 2009.12.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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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9년 주요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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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쇳말로 본 2000~2009] 대전환의 10년
9·11에 분노한 미국 아프간·이라크와 전쟁
무차별 테러 공포에 ‘인권 뒷전’ 감시 일상화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의 초고층빌딩들이 납치된 항공기에 부딪혀 잇달아 무너지는, 마치 영화와 같은 ‘종말적 풍경’이 펼쳐졌다. 냉전이 끝나며 전쟁의 위협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립이 사라질 것이라던 기대는 무너졌다. 2000년대 첫 10년간 인류가 목격한 것은 적이 모호해진 전쟁과 반테러라는 명목으로 국가 감시가 일상화된 지구촌의 풍경이다.
같은 해 9월20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선언했다. “이것은 미국만의 싸움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 전체의 싸움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편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인가.”
1990년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이나 교토의정서 등을 거부하며 일국 중심주의를 과시했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기치 아래 각국을 끌어들였다. 10월7일 알카에다 지원세력으로 탈레반 정권을 지목하며 벌인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해 다음날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일치한다’며 안보리의 승인마저 생략했다. 2002년 초 이란·북한과 함께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 정권은 2003년 3월 영국과 함께 바그다드 정밀폭격에 들어갔다.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은 적의 개념이 모호해진 지구촌 전쟁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탈레반 정권은 공습 한달 반 만에 무너졌고, 바그다드는 공습 20일 만에 함락됐다. 반테러 전쟁의 주체들이 못박았던 ‘적’이 사라졌는데도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프간 공습 이후 첫 1년 동안 숨진 아프간 민간인 수는 9·11 테러로 숨진 미국인 3000여명을 뛰어넘는다는 통계도 나왔다.
전쟁과 분쟁이 주로 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에 국한됐던 지난 시기와 달리, 선진국이나 도심 한가운데서도 언제든지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일상의 공포가 이 시기를 규정했다. 9·11에 이어 2005년 52명이 숨진 런던 지하철 테러가 일어나자 각국은 강도 높은 대테러 법안과 촘촘한 감시카메라 설치에 들어간다. 홍채인식·지문채취 등 개인정보 침해 위험이 큰 대책들도 ‘반테러’와 ‘안전’의 명목 아래 잇따라 도입됐다. 각국에 ‘보안(security)정치’가 본격화한 셈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테러가 혼동되는 경우도 흔해졌다. 미국의 반테러 전쟁에 협조하던 러시아나 중국은 체첸 반군이나 티베트 독립시위(2008년)를 유혈로 진압했지만, 국제사회는 의례적인 비판 이상을 내놓지 않았다. 각국이 ‘안전’을 강조할수록 국가 폭력은 묵인되고, 2008년 인도 뭄바이 테러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의 잇단 자살폭탄테러처럼 자생적 테러는 더 빈번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군이 운영하는 바그다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포로 성학대 사건(2004년)과 관타나모 미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2005년)은, 수용소의 포로에겐 인권조차 없음을 드러냈다.
‘반테러’의 광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이성과 평화에 대한 세계시민들의 갈구 또한 계속됐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당선에 쏟아진 관심은 그런 바람의 표출과 다름없다. 2009년 말 영국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증인으로 세울 이라크전 청문회에 들어갔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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