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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5 18:05 수정 : 2019.05.06 14:3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오후(현지시각) 첫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루시크섬 극동연방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AFP 연합뉴스

북한의 비핵화 협상 전략이 바뀌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북한은 대미협상에서 자신의 초기 비핵화 조치와 맞바꿀 우선 거래 품목으로 제시했던 부분 제재 해제 카드를 접고 대신에 체제안전보장 문제를 본격적으로 꺼내들려 하고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움직임이다.

원래 북한의 공식적인 비핵화 조건은 평화협정의 체결과 북-미 수교로 상징되는 체제안전보장이다. 그러나 고강도 국제사회의 제재로 자신의 경제발전 전략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 등 경제적 고통이 커지자 북한은 초기 비핵화 조치의 핵심 대가로 미국에 경제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은 드디어 북한의 약점을 잡았다는 듯이 오히려 제재 해제의 문턱을 높이며 북한 비핵화를 압박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과 이후 미국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강력한 제재로 인해 북한이 경제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결국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판단은 단언컨대 오판이며 비핵화 협상을 난항에 빠뜨릴 뿐이다. 북한은 경제적 고통 때문에 미국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북한의 속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러하다. 현재 북한은 경제 개혁과 시장화를 통해 최소한의 내부 발전 동력을 확보한 상태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 불가'가 북한 경제발전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주기는 하나 북한이 하루 세끼를 근근이 먹고 버틸 수 있는 마지노선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북한의 반응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북한은 자신이 경제제재 해제에 목을 맬수록 미국이 오히려 이를 북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고 더 강하게 옥죄며 대북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북한은 경제제재 완화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을 대미협상의 우선과제로 제시한 접근법의 실패를 인정하고 전략 수정을 선언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12일 북한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그 무슨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제재 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우리의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은 제재 장기화에 대비한 국가 운영을 시작했다. 그는 ‘자력갱생’을 최우선 국가전략으로 제시했으며 일부 대형 경제건설 프로젝트 현장을 찾아 완공일의 연장을 지시했다.

그런데 북한이 대미협상에서 제재 해제 카드를 접는다면 내놓을 카드는 체제안전보장일 수밖에 없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이미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가 비핵화 조치를 취해나가는 데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본래 안전 담보 문제이지만 미국이 아직은 군사 분야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보고 부분적 제재 해제를 상응조치로 제기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말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를 꺼냈다.

결국 이 상태로 흘러가면 체제안전보장 문제가 곧 비핵화 협상의 핵심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비핵화 협상은 지금보다 훨씬 까다롭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체제안전보장 문제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북-미가 갈등을 빚어오며 대립해온 쟁점이며 북한도 할 말이 많은 주제다. 미국이 제재 해제를 지렛대로 비핵화 조치를 견인할 때는 유리한 고지에서 대북협상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이 경제제재 해제에 연연하지 않고 체제안전보장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나오면 협상 지형은 백중세를 띠며 아슬아슬해질 것이다. 이 쟁점의 성격상 군사 분야에서의 긴장 발생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결국 북한의 협상전략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황에 빠지거나 장기화될 경우 한국 정부가 입을 피해도 막대하다. 현재처럼 남북관계가 한-미의 대북제재 공조에 묶인 상황에서는 향후 상당 기간 동안 남북관계 진전이 어려울 수 있다. 비핵화의 장기 교착이 한반도 평화의 시간을 늦추면서 남북관계의 장기 교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러한 위험 상황의 도래를 막기 위해 한국 정부가 어렵지만 다시 나서야 한다. 정부는 북한이 기존의 ‘비핵화-제제 완화’ 교환 구도의 틀 속에 머물러 있도록 설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계발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 정부에도 북한이 협상전략을 수정하지 않는 것이 미국에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유연한 협상 자세를 갖도록 설득해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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