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07 18:03
수정 : 2019.04.0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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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9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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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교착 상태에 빠진 비핵화 협상이 중대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주에 평양과 워싱턴에서 각각 열리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와 한-미 정상회담이 협상 재개와 상황 악화를 가를 분수령이 될 것 같다. 바로 이 중대 국면에서 한국의 중재 역할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북한발로 ‘남한도 당사자가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맞는 말이지만, 한국이 북핵 문제의 당사자라고 해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남-북-미 3자 간의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북-미 간 의견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한국이 중재를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자협상에서 특정 국가나 집단, 혹은 개인이 근본적으로는 당사자 위치에 있으나 특정 국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는 흔하다.
미국 쪽에서는 ‘한-미 동맹인데 미국 편에서 북한을 설득해야지 왜 중재를 하려 하느냐’는 불만도 나온다. 이 역시 온당한 주장이 아니다.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대북 제안이 합리적이고 현실성이 있다면 당연히 한국 정부가 미국의 안을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 안을 조정하고자 미국과 협의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하다. 그 협의가 때로는 북한과의 절충을 위한 대미 설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 비핵화 협상에서 한국의 역할에 대한 진정한 의문은 ‘중재자 개념’이 아니라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일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중재 역할은 북한을 설득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말발이 서야 하는데, 그것은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 축적한 상호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남북관계가 한-미 관계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어서 남한의 북한 설득이 가능할지 걱정이다. 오늘의 남북관계는 한-미 간 철저한 대북제재 공조가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속박되어 발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엔의 대북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남북교류 분야에서조차 제동이 걸리고 있다. 심지어 개성공단 입주기업이 지난 3년간 방치된 자기 공장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방북하겠다는 것도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공장 기계를 돌리겠다는 것도 아닌 단순 방문인데, 이마저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의약품 지원도 미국이 ‘노’ 하면 불가능한 상황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북관계의 자율공간이 존재하는지 자문해야 할 지경이다. 이쯤 되면 북한이 남한을 쳐다볼 이유가 없어진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무엇을 밑천으로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남북관계를 한-미 관계의 틀 속에 구속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는 남북관계가 비핵화 논의나 북-미 협의보다 단 한걸음도 앞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미국의 강박관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1년 전의 경험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1년 전 전쟁의 암운이 드리웠던 한반도에서 한국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극적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을 이루어냈으며 이를 발판 삼아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트고 북-미 정상회담까지 실현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우선 발전이 비핵화 협상을 촉진하고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켜온 것이 작금의 역사다. 그러나 지금 남북관계는 한-미 관계의 포로가 되어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진 비핵화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중재의 무거운 역할을 또다시 맡았다.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설득을 부탁하면서 맡는 중재 역할이다. 그러나 미국은 말로만 북한 설득을 부탁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먼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그 여건은 바로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의 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 자율성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 입장에서 남북관계의 대미 자율성은 미국의 시혜적 조처를 통해 확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애초에 남북관계는 한국 정부의 자율적 판단 영역이다. 정부는 이 점을 꼭 유념해야 한다. 정부는 필요에 따라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기도 하나, 국익 증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한-미 워킹그룹이 아니라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결정해야 한다.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한 신한반도체제를 담대하게 추진할 의지가 진정 있다면 어렵더라도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자주적인 결정권을 회복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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