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남북관계는 한반도 평화 증진의 주역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한반도 정세 주도 의지를 확고히 하고 국면을 개척할 전략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입안하여 국제협의에 나서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 한반도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올해 초 극적인 남북관계 개선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향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남북관계의 개선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크게 완화하고 북-미 관계의 극적인 전환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미국은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의 ‘을’처럼 취급하고 우리 정부 안에도 이를 당연시하는 숙명론적인 관성이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대남관계에서 종종 일방주의적인 태도를 보여 남북관계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 먼저 미국의 관점은 최근 종전선언 논의나 남북협력 사업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연내 성사시키기로 합의한 종전선언과 관련해 ‘비핵화 진전’이라는 전제를 내세우며 북한과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남북 합의 이전부터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 증진과 북한 비핵화 촉진을 목표로 추진해온 것이며, 미국도 이미 판문점선언을 지지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를 존중한다면 뒤늦게 판단이 바뀌었다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협력과 관련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 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개선의 기본방향과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체제 구축 등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엔의 대북 제재에 저촉될 수 있는 경제협력은 빠졌다. 남북군사통신선 복구,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수리, 남북 철도 연결 사업, 북한 산림 복구 협력, 남북연락사무소 개설 등 최근 논의 내용들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북한 경제 지원과는 상관없는 사업들이다. 철도 연결조차 남북을 오가는 열차가 운행되지 않는 한 북한 경제에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 사업들은 국제사회 대북 경제제재의 예외조치로 포괄적으로 인정받아 우리나라가 자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사업들을 위해 북한에 제공되는 물자에 대해서 우리는 건건이 미국과 협의를 해야 하고 건건이 승인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대북관계에서 미국의 판단이 우선한다는 일방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한-미 간 의견 차이가 있을 때, 때로는 한국 정부의 판단에 귀 기울이고 남북관계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비핵화 의지 언명과 핵·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북-미 정상회담 의사 표명을 이끌어낸 것이 남북관계 아니었나? 한국 정부가 주도한 남북관계의 진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반도 정세 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북한의 일방주의도 문제다. 북한은 새로운 남북관계 속에서도 종종 예정된 남북회담을 중단·연기하거나 우리의 회담 제의에 응답하지 않는 결례를 범해왔다. 남쪽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지 모르나 이는 과거의 구태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을 지적하며 극복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남북관계에서는 그 그릇된 관행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는 남북관계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요즘 북한은 북-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남북관계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비핵화 국면 전반에서 남북관계의 역할에도 좀 더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북한이 결국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숙원사업인 북-미 정상회담을 이루어낸 것 아닌가? 정부 안에서도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의 ‘을’로 받아들이는 관성이 작용한다. 통일부는 2년 반째 가동이 중단된 개성공단 내 자기 공장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입주기업들의 방북을 미국의 반대로 막고 있다. 외교당국자들은 미국 고위관리들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제공할 구체적인 상응조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대신에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대북제재 유지’를 공공연히 강조한다. 미국의 주문을 수용한 것일 테지만, 불필요하게 북한에 트집을 잡혀 정부의 대북 영향력만 약화시킨다. 결론적으로 남북관계는 어느 누구의 ‘을’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 증진의 주역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한반도 정세 주도 의지를 확고히 하고 국면을 개척할 전략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입안하여 국제협의에 나서야 한다. 마침 오늘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린다. 남북 양쪽이 상호이해와 호혜의 정신을 발휘하여 남북관계가 현재의 교착상황을 타개하는 중요한 무기라는 점을 보여주기 바란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 한반도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칼럼 |
[이종석 칼럼] 남북관계는 어느 누구의 ‘을’도 아니다 |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남북관계는 한반도 평화 증진의 주역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한반도 정세 주도 의지를 확고히 하고 국면을 개척할 전략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입안하여 국제협의에 나서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 한반도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올해 초 극적인 남북관계 개선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향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남북관계의 개선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크게 완화하고 북-미 관계의 극적인 전환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미국은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의 ‘을’처럼 취급하고 우리 정부 안에도 이를 당연시하는 숙명론적인 관성이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대남관계에서 종종 일방주의적인 태도를 보여 남북관계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 먼저 미국의 관점은 최근 종전선언 논의나 남북협력 사업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연내 성사시키기로 합의한 종전선언과 관련해 ‘비핵화 진전’이라는 전제를 내세우며 북한과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남북 합의 이전부터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 증진과 북한 비핵화 촉진을 목표로 추진해온 것이며, 미국도 이미 판문점선언을 지지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를 존중한다면 뒤늦게 판단이 바뀌었다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협력과 관련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 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개선의 기본방향과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체제 구축 등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엔의 대북 제재에 저촉될 수 있는 경제협력은 빠졌다. 남북군사통신선 복구,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수리, 남북 철도 연결 사업, 북한 산림 복구 협력, 남북연락사무소 개설 등 최근 논의 내용들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북한 경제 지원과는 상관없는 사업들이다. 철도 연결조차 남북을 오가는 열차가 운행되지 않는 한 북한 경제에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 사업들은 국제사회 대북 경제제재의 예외조치로 포괄적으로 인정받아 우리나라가 자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사업들을 위해 북한에 제공되는 물자에 대해서 우리는 건건이 미국과 협의를 해야 하고 건건이 승인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은 대북관계에서 미국의 판단이 우선한다는 일방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한-미 간 의견 차이가 있을 때, 때로는 한국 정부의 판단에 귀 기울이고 남북관계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비핵화 의지 언명과 핵·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북-미 정상회담 의사 표명을 이끌어낸 것이 남북관계 아니었나? 한국 정부가 주도한 남북관계의 진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반도 정세 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북한의 일방주의도 문제다. 북한은 새로운 남북관계 속에서도 종종 예정된 남북회담을 중단·연기하거나 우리의 회담 제의에 응답하지 않는 결례를 범해왔다. 남쪽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지 모르나 이는 과거의 구태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을 지적하며 극복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남북관계에서는 그 그릇된 관행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는 남북관계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요즘 북한은 북-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남북관계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비핵화 국면 전반에서 남북관계의 역할에도 좀 더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북한이 결국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숙원사업인 북-미 정상회담을 이루어낸 것 아닌가? 정부 안에서도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의 ‘을’로 받아들이는 관성이 작용한다. 통일부는 2년 반째 가동이 중단된 개성공단 내 자기 공장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입주기업들의 방북을 미국의 반대로 막고 있다. 외교당국자들은 미국 고위관리들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제공할 구체적인 상응조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대신에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대북제재 유지’를 공공연히 강조한다. 미국의 주문을 수용한 것일 테지만, 불필요하게 북한에 트집을 잡혀 정부의 대북 영향력만 약화시킨다. 결론적으로 남북관계는 어느 누구의 ‘을’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 증진의 주역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한반도 정세 주도 의지를 확고히 하고 국면을 개척할 전략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입안하여 국제협의에 나서야 한다. 마침 오늘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린다. 남북 양쪽이 상호이해와 호혜의 정신을 발휘하여 남북관계가 현재의 교착상황을 타개하는 중요한 무기라는 점을 보여주기 바란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 한반도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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