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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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이자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가 더 슬프다
아들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목욕을 돕다가 아이의 손바닥이 발갛게 부푼 것을 발견했다.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께 회초리로 맞았단다. 엄마가 가진 체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아이 스스로 잘못했다니 정황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 반에 ○○이라고 있는데, 걔가 좀 엉뚱해서 아이들한테 놀림을 당하거든. 그걸 선생님이 아시고 ○○이를 괴롭히는 데 가담한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해서 나도 나가서 맞았어.”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더니, 내 아들이 ‘왕따’의 가해자가 되었단 말인가? 화나고 놀라서 네가 정말 ○○이를 괴롭혔냐고 따져 물으니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놀리진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놀리는 걸 그냥 구경했어. 그러니까 나도 ○○이를 괴롭히는 데 가담한 거잖아.”
현명한 엄마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해라!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은 오직 경험을 통해 가치와 선악과 우열의 구분법을 학습한다. 그러하기에 최초의 교사, 엄마로 대표되는 양육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아이가 흙을 만지면 어떤 엄마는 단박에 “지지!”라고 외치며 사납게 손을 낚아챈다. 그럴 때 아이에게 흙과 땅은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놀이터를 오염시키는 애완동물이나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기생충, 각종 유해 세균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애초에 흙을 ‘지지’로 학습한 아이에게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사람 사이의 일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나는 혼란스럽고 불편한 채로 아이의 솔직한 고백을 칭찬하고 방관의 태도를 꾸짖었다. 최소한 너는 구경만 했으니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해자를 격리해야 한다는 원성이 들끓는다. 하지만 상처 입고 상처 입힌 아이들은 사건의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토록 끔찍한 잔혹극이 교실 한구석에서 버젓이 펼쳐지는데도 침묵하는 방관자이자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가 어쩌면 더 무섭고 슬프다. 때로 가해자의 등 뒤에서 잔인한 쾌감을 즐기다가 돌아서 불의를 외면하고 폭력에 복종했다는 굴욕감에 괴로워하며, 아이들은 점차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과, 비겁을 떨치고 용기를 내어 그것을 표현하는 마음의 힘을.
나쁜 아이들이 갑자기 많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쁜 세상이 아이들을 점점 망가뜨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했던 길벗 중 어느 중학교의 ‘학주’(학생주임)인 교사가 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면 그녀는 시르죽은 얼굴로 도망치듯 산에 왔다. 집에서 부모에게 쪼이고 학원에서 압박당한 아이들이 스트레스와 분노를 학교에서 터뜨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사건·사고가 서너배 이상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친구를 때리고 물건을 훔치고 유리창을 깨면서 발버둥질해야만 배겨낼 수 있는 압박 속에서 아이들의 일탈은 가학적이자 피학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디까지 껴안고 어디부터 내쳐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아프다. 세상이 아프다. 아이들이 마음을 잃었다. 세상이 텅 비었다. 아프고 텅 빈 그들을 징계하고 훈시해봤자 별반 소용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아이들이 잔인하고 가혹해질수록 어른들이 만든 이 잘난 세상의 편견과 냉담과 이기심이 명징해질 뿐이다. 눈시울이 화끈하고 뒤통수가 뜨끔하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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