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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16 19:20 수정 : 2011.12.16 19:20

김별아 소설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성으로 지어낸
마음이 인권센터라는 토굴의 주춧돌

해 가기 전에 얼굴이나 보자는 말치레가 씨가 되어 연일 분주하다. 어젯밤의 즐거움만큼 괴로운 아침에 배를 깔고 엎어졌노라니 얼마 전 읽은 신현수 선생의 시 한 대목이 떠오른다.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 하고 술값도 안 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안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엘리베이터 거울을 깨뜨려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운 날은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 낸 날’이라는…. 자의식 강한 술꾼의 명시다. 자본을 거부하는 저항적 자세나 금전을 비천하게 여기는 군자연한 태도와 상관없이, 돈은 욕망 혹은 마음과 함께 움직이는 기묘한 물건이다. 아리딸딸한 술꾼에게조차 지갑 개봉의 심리는 심오할지니, 행여 따돌리고 싶은 거머리꾼이 있다면 급전 좀 돌려달라고 해보라는 우스갯소리가 이해됨 직하다.

그러하기에 용산참사 추모행사에서 ‘불법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을 살고 나온 박래군 형이 시민과 인권활동가를 위한 공간인 인권센터 건립 기금 10억을 모금하겠다고 나섰을 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금액의 크기는 차치하고 그 전부를 나라와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모으겠다니, 아무튼 래군이 형은 ‘사서 고생’의 달인이었다. 예상대로 형은 지난 1년 동안 말마따나 불철주야 고군분투했다. 강연회, 콘서트, 뮤지컬, 전시회 등 오만 깍두기판을 벌이다 못해 천릿길 대장정에 나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비무장지대 생명평화동산까지 온 나라를 쏘다녔다. 하지만 곡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목표는 쉽게 달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면한 투쟁 과제가 즐비한데 왜 뜬금없는 인권센터 건립이냐는 질문들이 무성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현실도 외면하는 세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준비하자는 호소가 통하기 어렵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아무리 대단한 명분이라도 극적인 사건이나 그럴듯한 이벤트가 아니면 쉽사리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을 지배하는 돈의 논리요 문법이다.

그럼에도 지난 수요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후원의 밤에서 만난 래군이 형과 인권재단 ‘사람’의 활동가들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금된 액수는 목표의 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연신 함박웃음으로 동전이 가득 든 작은 저금통과 그것을 내미는 따뜻한 손들을 마주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을 지키기 어렵다’(無恒産子無恒心)는 맹자의 말씀과, 신자유주의가 그려낼 디스토피아를 대비해 기억과 가치를 전승할 ‘토굴’을 파야 한다는 <한겨레> 기자 안수찬의 제언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리 시절이 하수상하고 전망이 암울해도 누군가는 다가올 새날을 위해 저축을 하고 살터를 확보해야 한다. 미래가 현재를 일으키는 힘이 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그를 대비한 재산은 탐욕이 아니고 토굴은 은둔이 아니다. 산술적인 계산으로 10억은 10만명이 1만원씩 내면 모이는 돈이지만 그것은 1만원짜리 10만장이 아니라 10만개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성으로 지어낸 마음이 인권센터라는 토굴의 주춧돌이기에, 래군이 형은 표 팔고 그림 팔고 저금통을 돌려 아무러한 환난이라도 견뎌낼 굳건한 마음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문득 부자가 아닌 것이 속상한 날이 있다. 형을 글감으로 삼은 고료라도 내놓고 먹었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돌아오는 밤, 버스 차창 너머로 정처를 모르는 수많은 마음들이 배회하고 있다. 외투 주머니 속에 바스락거리는 종이 저금통을 만져본다. 이 저금통 가득 채울 마음을 찾아, 토굴을 찾아 겨울 거리로 나설 때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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