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29 19:06
수정 : 2011.07.2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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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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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같고도 다른 그들이 신기했다
그 시절은 내게 상처도 훈장도 아니다. 오직 서툰 만큼 용감하고 어리석은 만큼 아름다웠던 청춘, 봄싹처럼 파란 한창때였다. 세상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뜨겁게 삶을 껴안고 싶었기에 역사에 아프고 정의에 목말랐다.
그런 지난날의 내 모습과 꼭 닮은 젊은 벗들을 이십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났다.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과 한국대학생문화연대에서 주관한 ‘청춘전략포럼’의 문학 강연에서였다. 강산이 두어번쯤 변하는 동안 ‘백만 학도’는 3백만 대학생이 되고 시대도 사람살이도 어지간히 바뀌었다. 대학에서 교양 및 인문학을 가르치는 친구 하나는 수업 중에 1986년 분신 사망한 김세진·이재호 열사를 이야기했다가 몹시 당황스런 일을 겪었다고 했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희생을 감수하며 외쳤던 구호가 ‘전방입소 반대’였다고 말하는 순간 학생들 사이에서 뜻밖의 폭소가 터졌던 것! 친구는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다지만 그 웃음이 열사들에 대한 냉소나 비소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웃음의 원리 중 하나는 모순 이론일지니,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본능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친구의 제자들은 그저 25년 전 저희의 동년배였던 젊은이들의 절박함과 분노와 열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절에 이런 세대의 ‘운동권’이라니?! 후배이자 아들딸 같은 그들을 만나러 가는 심경은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만나면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았다. 아니, 선배랍시고 할 말이 아무것도 없을 듯도 하였다. 누군가는 사회 모순에 분노하지 않고 패기도 없는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질타하지만,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에 내몰린 채 1년에 10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목숨까지 잃는 몹쓸 세상을 만든 것은 바로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다. 마땅히 그들에게 미안해해야 할뿐더러 나잇값을 하려면 설교보다는 자기성찰이 우선이다.
어쩌면 궁지에 몰려 주눅이 들었거나 고립된 채 소수파로 전락해 턱없이 강경해졌을지도 모를 후배들을 상상하며 강의실의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은 것은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젊음으로 눈부신 그들이었다. 물론 학생운동의 쇠퇴와 현실적인 불안으로 예전보다 훨씬 적은 수였지만 고민의 치열함과 실천의 의지에서 선배 세대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다만 시대와 세대가 변화했기에 표현 방식과 정서가 다를 뿐이었다. 이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같고도 다른 그들이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무례한 표현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강연이 끝나고 포럼의 기획단장은 얄따란 문집 한 권을 건넸다. 공교롭게도 필자 중 문학 전공자는 한 명도 없는 소박한 문집의 제목은 <빨간 책>! 내용이 야하거나 불온해서가 아니라 표지가 빨간 책이었다. 하지만 빨간 것은 표지 색깔만이 아니었다. 명문대 합격자의 사진과 이름이 박힌 플래카드가 휘날리는 학원, 여섯 살짜리가 알던 세상 전부를 뒤바꿔버린 아이엠에프(IMF), 유년의 추억을 모두 묻어버린 아파트 재건축, 그리고 연대와 나눔과 희망의 생생한 증거인 희망버스까지… 젊은 그들이 겪은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열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 빨간 책이었다.
물론 그들은 서툴고 거칠다. 모쪼록 피하길 바랐던 구세대의 전철을 밟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좌충우돌하며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조차 젊음의 권한이자 의무일지니,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미래는 어쨌거나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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