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01 19:16
수정 : 2011.07.0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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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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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희번덕이며 욕설 퍼붓던 노인,
울분을 참지 못해 몸부림치던 사내
불화살처럼 내리꽂히던 햇빛과 갱엿같이 녹아내리던 아스팔트의 열기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저 그날따라 사나웠던 일진 때문일 수도 있다. 볼일이 있어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연거푸 기묘한 일을 목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만취한 노인 하나가 비틀걸음으로 의자를 향해 다가온 것이 첫 번째 소동의 시작이었다. 의자에는 몸을 옹그리면 한 사람이 충분히 앉을 만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굳이 옆에 앉았던 20대 여성에게 비키라는 거친 손사랫짓을 했다. 최신형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그녀가 조금 일찍 그 손짓을 보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어마뜨거라 자리를 피한 뒤에도 세상 어디에서나 옹그릴 수밖에 없는 노인의 울증이 정류장 의자의 비좁은 자리에서 폭발한 듯, 작가에게마저 모국어의 풍부함을 새삼 인식시키는 현란한 욕설의 향연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노인이 떠난 정류장에 두 번째 소동의 주인공인 중년 사내가 땟국에 전 와이셔츠 차림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사모님, 하나 팔아주슈. 오늘 개시도 못했어요. 네?” 외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들 앞에서 아가리를 벌린 그의 가방 속에는 나들이 길에 사기엔 아무래도 객쩍은 행주며 수세미 따위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무리 불필요해도 언젠간 용도가 있으리라 여기며 누구라도 하나쯤 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판매에 실패한 그는 별안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덫에 치인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살아보려는데, 죽으라고 해! 더 이상 날더러 어떡하라고?!” 장사를 하기엔 변죽과 패기가 부족하고 구걸을 하기엔 수치심과 자존심을 버릴 수 없는 사내는 길바닥 한가운데서 생떼 부리는 어린애처럼 발버둥질했다.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해 잡아타고 앉으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증오에 찬 눈을 희번덕이며 욕설을 퍼붓던 노인과 울분을 참지 못해 몸부림치던 사내에게서 자멸과 극단의 징후를 본 것은 소설쟁이의 과한 상상력일까? 우연히도 버스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묻지마 살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묻지마 관광’이 익명의 장막 안에서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라면 ‘묻지마 살인’은 무작위의 대상을 향해 꿍꿍 윽박았던 분노를 표출하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사회 안전망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사회에는 오직 가난과 가난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한다.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경우는 그나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도 함께 의논할 짝패가 있을 때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잔혹한 미궁에 갇힌 채 절망한 개인에게는 두 가지 길밖에 다른 것이 없다. 죽이거나 혹은 죽거나. 그래서 날로 증가하는 자살률, 그중에서도 급증하는 생계형 자살과 ‘묻지마 살인’은 실로 동전의 양면이나 매한가지다. 마음 약한 사람은 무력감에 스스로를 죽이고, 그 살의가 영혼을 뚫고 나간 사람은 칼을 신문지에 말아 들고 거리로 나선다.
기실 세상을 향해 ‘묻지마’를 외치는 이들은 한 번도 세상으로부터 질문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살 만하냐고, 얼마나 힘드냐고,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물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외감이 끝내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그래서 창졸간에 목격한 봉변보다 더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냉담했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아무도 노인과 사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절망감으로 분노하는 그들을 외면한 채로, 우리는 끝내 죽이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조악한 수세미일망정 하나 사들지 못한 빈손이 내내 부끄럽고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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