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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6 17:48 수정 : 2018.07.26 19:49

김외현
베이징 특파원

1995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미국을 방문했다. 대만의 독자적 외교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중국이 반발했지만, 미국 의회가 대만의 뒷배가 됐다.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실험과 해군 훈련을 하며 위협했다. 이에 미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보내 대만해협을 통과시키자, 중국은 군사력 열세를 절감하며 분루를 삼켰다.

1999년 5월 코소보 분쟁 도중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이 미군에 폭격당했다. 대사관 직원 3명이 숨지고 20명이 다쳤다. 미국은 낡은 지도 탓에 오폭을 했다며 사과했다. 중국 정부는 ‘야만적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베이징 미국대사관 앞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그 시절 학생들은 교사들에게서 “나라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이 무렵의 베스트셀러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은 상처 입은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달랬다.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은 전세계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구실을 맡을 것이며, 미국의 패권 의욕을 가로막는 막강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중국 외교 노선인 ‘도광양회’는 ‘칼 빛을 감추고 힘을 기르라’는 섬뜩한 뜻이지만, 결국 ‘가만히 있으라’를 받아들였던 아픔의 역사다. 중화민국의 초대 외교총장(장관)이었던 루정샹이 “약한 나라는 외교가 없다”며 탄식하던 때와 얼마나 다를까. 루정샹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1차대전 승전국 자격으로 참석한 중국대표단 단장이었지만, 일본 등 다른 승전국들의 등쌀에 밀려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40년 전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이르러서야 중국은 본격적으로 힘을 키웠다. 그리고 감췄다. 1991년 소련 쿠데타 당시 이를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에, 덩샤오핑은 ‘도광양회, 절부당두(결코 머리가 되지 말라), 유소작위(해야 할 일을 하라)’라는 답변을 남겼다. 다른 나라 사정에 끼어들지 말고, 각국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스스로의 평화적 발전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덩샤오핑은 이런 노선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100년간 이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덩샤오핑 사후 중국 경제는 한층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지 않아 막을 연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그동안 경제적·군사적 위용을 과시해왔다. 중국이 화려한 ‘칼춤’을 뽐내는 외교로 전환한다는 관측이 이어졌다. ‘일대일로’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영향력 확장으로 비쳤고, 발전한 첨단산업은 세계의 감탄을 샀다. 민주성이 불완전한 체제가 ‘중국특색’으로 포장되면서 체제 대결 양상도 등장했다. 도광양회는 끝이 난 것 같았다.

이달 들어 무역전쟁이 본격화한 뒤, “시진핑은 도광양회 정책을 버린 적이 없다”는 중국 관료 인터뷰가 나온다. 중국 당국과 관영매체들이 한때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미래 먹거리산업 전략 ‘중국제조 2025’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중국 통신기업 중싱(ZTE)이 미국의 제재로 도산 위기에 처하는 등 실력 차가 확인되자, 중국이 다시 도광양회로 돌아간 것이란 평가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칼’은 감출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은 그에 걸맞은 자존심을 국내외에 과시하려 한다. 대만해협은 1990년대와 달리 이제 중국 항공모함이 제 집이라며 돌아다닌다. 남중국해도 마찬가지다. ‘대사관 오폭’이 아니어도, 지난해 한국 사드 배치, 2012년 일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등에서 중국은 주권 문제에 대한 무서운 보복 의지를 보여줬다. 미국과의 알력 탓에 일시적으로 태도가 바뀐다 해도 도광양회는 언젠가는 끝난다. 얼마나 미뤄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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