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특파원 “<신화통신>이 대만에 보낸 기자 2명이 오늘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이는 조국 대륙(중국)의 매체가 처음으로 대만에 기자를 보낸 것이다.” 2001년 2월8일 타이베이에 처음 파견된 판리칭, 천빈화 등 <신화통신> 기자 2명은 자신들의 도착 소식을 흥분과 함께 타전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지만, 무엇보다 2000년 5월 천수이볜 총통 취임 이래 진행된 ‘취재 개방’ 정책의 결과였다. 천수이볜 정부는 <신화통신>, <인민일보>,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중앙인민라디오>(CNR) 등 4대 매체를 시작으로 중국 매체에 문호를 개방했다. 중국공산당 선전 기관인 관영 매체들의 대만 진입을 허용하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비록 대만에 역사적 첫 정권교체가 이뤄져 민진당이 집권했지만, 야당이 된 국민당이 50년 전까지 공산당과 총부리를 맞댄 기억은 여전히 선연했다. 반대로 대만 기자들이 중국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1987년 9월11일 대만 <자립만보>는 기자 2명의 중국 취재 허가를 일본 도쿄에서 우회적으로 받아내 첫 중국 취재를 진행했다. 같은 해 11월엔 장징궈 총통이 ‘노병 고향 방문’을 허용하는 양안(중국-대만) 교류 정책을 전격 개시했고, 중국 당국은 대만 기자들의 방문을 환영하고 나섰다. 대만 매체들은 이산가족 상봉 취재를 위해 중국 땅을 밟았다. 중국 당국은 1996년부터 대만 매체에 공식 주재를 허가했다. 그러나 양안의 상호 기자 파견은 순조롭지 않았다. 권력이 숨겨놓은 민감한 정보를 찾아다니는 기자의 일은 늘 스파이로 의심받기 일쑤다. 중국 내 대만 기자들은 항시 감시당했고 군사훈련 현장 등에서 붙잡혀 구류당하면서 신문을 받기도 했다. 대만도 대개 공산당원들인 중국 관영 매체 기자들의 취재 대상과 내용을 감시했다.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하는 중국과 다당제 체제인 대만은 언론의 위상과 기능·역할도 달랐다. ‘언론 자유’의 폭만큼 파견 규모의 차도 컸다. 지금까지 중국을 다녀간 대만 기자는 5000명이 넘지만, 대만을 다녀간 중국 기자는 약 200명 수준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중국에는 대만 매체 10곳, 대만에는 중국 매체 10곳이 주재 기자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제약 조건이 많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서로 ‘정식 지국’ 설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개별 기자를 파견할 뿐이다. 체류 기간은 최장 3개월로 제한한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서 만나는 대만 기자들은 명함에 집 주소가 적혀 있고, 석 달마다 교체된다. 대만으로 떠나는 중국 매체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대만 기자들에게 취재 대상의 동의를 구해야만 접촉할 수 있다는 등의 추가 조건을 내건다. 서로 신뢰가 충분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중국과 대만의 기자 파견 역사를 돌아본 이유는 한반도에 찾아온 ‘봄날’ 때문이다. 남북 각계의 교류가 출발신호만 기다리고 있겠지만, 남북 상호 이해를 제고하려면 언론 교류는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서로를 들여다보는 올바른 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발빠른 언론사는 ‘평양지국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자들 중에도 ‘초대 특파원’을 욕심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총련 등 각종 채널로 북한 당국을 수년간 설득한 끝에 2006년 평양지국 개설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언론이 체제 차이를 극복하고 취재 여건을 보장받으며 평양지국을 설립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양안의 선례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꿈같은 현실을 계속 보다 보니 꿈을 꾸면 모두 이뤄질 것만 같다. oscar@hani.co.kr
칼럼 |
[특파원 칼럼] ‘한겨레’ 평양지국은 언제 가능할까 / 김외현 |
베이징 특파원 “<신화통신>이 대만에 보낸 기자 2명이 오늘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이는 조국 대륙(중국)의 매체가 처음으로 대만에 기자를 보낸 것이다.” 2001년 2월8일 타이베이에 처음 파견된 판리칭, 천빈화 등 <신화통신> 기자 2명은 자신들의 도착 소식을 흥분과 함께 타전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지만, 무엇보다 2000년 5월 천수이볜 총통 취임 이래 진행된 ‘취재 개방’ 정책의 결과였다. 천수이볜 정부는 <신화통신>, <인민일보>,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중앙인민라디오>(CNR) 등 4대 매체를 시작으로 중국 매체에 문호를 개방했다. 중국공산당 선전 기관인 관영 매체들의 대만 진입을 허용하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비록 대만에 역사적 첫 정권교체가 이뤄져 민진당이 집권했지만, 야당이 된 국민당이 50년 전까지 공산당과 총부리를 맞댄 기억은 여전히 선연했다. 반대로 대만 기자들이 중국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1987년 9월11일 대만 <자립만보>는 기자 2명의 중국 취재 허가를 일본 도쿄에서 우회적으로 받아내 첫 중국 취재를 진행했다. 같은 해 11월엔 장징궈 총통이 ‘노병 고향 방문’을 허용하는 양안(중국-대만) 교류 정책을 전격 개시했고, 중국 당국은 대만 기자들의 방문을 환영하고 나섰다. 대만 매체들은 이산가족 상봉 취재를 위해 중국 땅을 밟았다. 중국 당국은 1996년부터 대만 매체에 공식 주재를 허가했다. 그러나 양안의 상호 기자 파견은 순조롭지 않았다. 권력이 숨겨놓은 민감한 정보를 찾아다니는 기자의 일은 늘 스파이로 의심받기 일쑤다. 중국 내 대만 기자들은 항시 감시당했고 군사훈련 현장 등에서 붙잡혀 구류당하면서 신문을 받기도 했다. 대만도 대개 공산당원들인 중국 관영 매체 기자들의 취재 대상과 내용을 감시했다.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하는 중국과 다당제 체제인 대만은 언론의 위상과 기능·역할도 달랐다. ‘언론 자유’의 폭만큼 파견 규모의 차도 컸다. 지금까지 중국을 다녀간 대만 기자는 5000명이 넘지만, 대만을 다녀간 중국 기자는 약 200명 수준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중국에는 대만 매체 10곳, 대만에는 중국 매체 10곳이 주재 기자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제약 조건이 많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서로 ‘정식 지국’ 설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개별 기자를 파견할 뿐이다. 체류 기간은 최장 3개월로 제한한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서 만나는 대만 기자들은 명함에 집 주소가 적혀 있고, 석 달마다 교체된다. 대만으로 떠나는 중국 매체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대만 기자들에게 취재 대상의 동의를 구해야만 접촉할 수 있다는 등의 추가 조건을 내건다. 서로 신뢰가 충분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중국과 대만의 기자 파견 역사를 돌아본 이유는 한반도에 찾아온 ‘봄날’ 때문이다. 남북 각계의 교류가 출발신호만 기다리고 있겠지만, 남북 상호 이해를 제고하려면 언론 교류는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서로를 들여다보는 올바른 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발빠른 언론사는 ‘평양지국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자들 중에도 ‘초대 특파원’을 욕심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총련 등 각종 채널로 북한 당국을 수년간 설득한 끝에 2006년 평양지국 개설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언론이 체제 차이를 극복하고 취재 여건을 보장받으며 평양지국을 설립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양안의 선례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꿈같은 현실을 계속 보다 보니 꿈을 꾸면 모두 이뤄질 것만 같다.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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