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26 18:41
수정 : 2015.11.26 18:41
속 모르는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힐난했다. 1981년부터, 그리고 1991년부터는 매년 한차례도 빠짐없이 북한을 다니며 ‘평화 설계자’로 헌신해온 그에게 찬사만 쏟아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는 그를 ‘종북’ 혹은 ‘친북’으로 매도했고, 누구는 ‘기대했던 것보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평화, 특히 ‘한반도 평화’라는 화두와 씨름하며 평생 외길을 걸어왔다.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가 오는 12월4일, 76살로 대학에서 은퇴한다. 그는 미국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1970년 조지아대 ‘국제관계학’ 교수로 임용됐다.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국의 젊은 교수를 채용했으니 학교로서도 파격적인 조처였다. 그렇게 45년을 한 대학에 몸담았고, 5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했다.
박 교수를 처음 본 것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 시절이었으니, 2005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어번 그가 방북담을 발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얘기했던 적은 없던 차에, 지난 16일 박 교수와 요한 갈퉁 교수의 대담을 취재하기 위해 조지아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뒤로 몇번의 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짧게 인상 비평을 하자면, 그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아들뻘인 기자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한다. 일가를 이룬 사람들한테 풍기는 거만함도 없다. 그냥 시골 할아버지처럼 푸근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이런 방향으로 기사를 써달라고 주문하지도 않는다. 되레, 대담의 핵심 주제를 ‘파리 테러’로 하자고 제안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였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평생 ‘평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한 그는 참으로 낙천적이다. 북-미, 또는 남-북-미 전문가 회의를 꾸리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 뭐냐고 묻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경비 조달(펀딩)은 늘 어려운 숙제 아니었느냐고 재차 묻자 “펀딩은 항상 어렵다. 그러나 좋은 착상에,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료 친구들이 한국과 미국, 북한에 있는 한 돈이 없어 평화 만들기를 못 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가는 길이 옳고, 다른 사욕이 없으면 틀림없이 성사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역할은 한반도 정세가 악화될 때 더욱 빛을 발휘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주선해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막았고, 2003년 11월에도 북핵 위기 해소를 위해 북-미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한 회의를 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 대해선 많이 아쉬워했다.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가 워낙 기복이 심하다 보니 “정세가 나쁠 때 북한에 가면 일이 잘 안 풀려 참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그가 학교에선 은퇴를 하지만, 한반도 평화운동에서까지 은퇴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머릿속엔 벌써 내년도 계획이 꽉 차 있다. 평화에 대한 강의도 여러 대학에서 계속할 것이다. 평화는 ‘분쟁 해소’라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조화’이며, ‘조화는 이질적인 것들의 대화’라는 그의 지론은 다음 세대 평화 설계자들의 철학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
그런데,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겠다는 후학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적대적 관계의 서로 다른 나라들한테 모두 신뢰를 얻어야 하고,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도 아니다. 고된 길이기에, 물망에 오르는 후학들의 등을 떠밀 수가 없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