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31 18:53
수정 : 2013.11.1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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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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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 잠깐 기다리세요!”
지난달 14일 특파원 부임을 위해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뒤 향한 곳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부동산 업체였다. 그곳에서 미리 계약한 방의 열쇠를 받아드는 것으로 3년 동안의 도쿄 특파원 생활이 시작됐다. 계약서에 가볍게 도장을 찍고 일어서려는 순간 부동산 업체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붙들어 세웠다. “길상,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그랬다. 뭔가가 많이 남아 있었다. 먼저, 집 계약과 관련된 ‘중요사항 설명서’, ‘임대주택분쟁방지조례에 기초한 설명서’ 등을 읽고 도장을 찍었다. 집 계약에 따른 보증보험, 화재보험 계약서를 확인하고 역시 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어, 집을 오랫동안 비울 경우, 열쇠를 잃어버릴 경우, 자전거를 새로 사 타게 될 경우, 가족이 늘어날 경우에는 미리 서면으로 신고를 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도 전해 들었다.
“아니 왜 자전거까지?” 따지듯 묻자 부동산 회사 직원은 아파트 관리회사에 자전거를 ‘서면으로’ 등록하고, ‘등록 딱지’를 받지 않으면 정해진 보관소에 자전거를 둘 수 없고, 분실에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렇다. 일본인들은 뭐든 문서로 정리하고, 따지고 들어, 명확히 책임 소재를 정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일본인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히 임기응변으로 대응해 가는 한국식 문화는 애초부터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전혀 이해되지 않던 일본 사회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9월6일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유출을 이유로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의 해산물을 전면 수입금지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번 조처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며 끈질기게 철회를 요청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인 대부분은 “먹거리 안전과 관련된 문제인데 일본이 너무하지 않냐”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를 일본 처지에서 보자. 일본은 2011년 3월 원전 사고 이후 줄곧 수산물 금수 조처를 취하고 있는 중국·대만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곧, 일본은 한국의 금수 조처 자체보다 그런 조처를 취하며 한국이 제시한 ‘근거’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금수 조처가 일본인들을 납득시키려면, 9월께 후쿠시마 주변 바다의 방사능 수치에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으니 한국의 조처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고, 그 때문에 철회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 위안부 강제동원을 국가가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에 집착하는지, 한국인의 개별 청구권을 부인하며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문서’를 금지옥엽처럼 떠받드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를 지난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 좁은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뭔가 증거가 없으면 정말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앞으로 일본과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큰 과제를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려면 그들보다 더 치밀하고 깐깐하게 자료를 준비하고 문서를 모아야 한다.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감해 줄 것이란 낙관적인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 사할린 잔류 조선인 귀국 비용 지원, 원폭 피해자 치료, 몇개의 문화재 반환 등 일본이 그동안 보인 다소간의 양보들은 그들 식의 자료 검토를 통해 납득이 되어 시행한 것들이지, 적당히 우리의 사정을 봐준 것은 하나도 없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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