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23 19:21
수정 : 2012.02.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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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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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부자증세’는
선거용으로 끝나고
실제론 복지예산만
줄어들 수도 있다
학교에 다녀온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손바닥을 쫘악 펴 보인다. ‘런치 머니’(급식비)라는 푸르스름한 도장이 찍혀 있다. 아이의 급식비가 다 떨어졌으니, 급식비를 보내라고 학교 식당에서 찍어준 것이다. 급식비는 아이가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자동으로 학교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고, 통장 잔액이 5달러 이하가 되면 내 통장에서 50달러가 학교 통장으로 이체되도록 해놓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의아했다. 다음날에는 집으로 돌아온 아이의 티셔츠에 ‘런치 머니’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머니 안 가져가면 나 런치 못 먹어”라고. 아이 엄마가 학교에 가서 알아보니, 학교식당의 전산시스템이 바뀌어 급식비 연결 통장 잔액이 10달러 미만으로 떨어지면 학부모에게 통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통장의 잔액 기준을 ‘5달러’에서 ‘20달러’로 바꿔뒀다.
아주 미세하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는 퍽 관대했던 미국이 조금씩 조금씩 각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의 한끼 점심값도 지난해보다 올랐다.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공립학교 예산이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면 학교에서 무료로 해주던 예체능 수업은 지난해부터 거의 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반도 안 찼던 스쿨버스가 버스 대수를 줄이고 인근 초등학교가 폐쇄되면서 학생 수가 늘어 이젠 거의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지난 13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의 노던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3회계연도(2012년 10월1일~2013년 9월30일) 예산안을 발표했다. ‘버핏세’로 일컫는 부자증세 도입, 부유층 배당소득세율 인상, 아프간 철군 등을 통한 국방비 5% 이상 삭감 등 재정적자 타개를 위해 내놓은 방안들이 상당히 ‘진보적’이다. 동시에 상당히 ‘포퓰리스트적’이기도 하다. 부자증세는 중산층으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재정적자 감축을 최우선 목표로 내걸었으면서도 중산층의 세금감면은 연장했다.
그런데 제프리 색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런 오바마 예산안에 대해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산 절감액의 상당 부분이 교육, 환경보호, 공립학교 급식지원, 노인복지 분야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예산안을 보면, 연방정부 지출이 2011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2.6%에서 2020년에는 19.3%로 줄어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화당이 주창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셈이다. 이는 곧 복지재원 축소를 뜻한다. 더욱이 오바마 행정부가 예산안 간판으로 내세운 ‘부자증세’가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온전히 통과되리라곤 오바마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부자증세’는 선거용 선전으로 끝나고, 실제론 복지예산만 줄어드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오바마 예산안을 보면 우리나라의 포퓰리스트적인 움직임이 같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도 올해부터 ‘한국판 버핏세’가 적용된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3억원 초과 소득에 대해서만 38% 세율을 매겼다. 참여연대 조사를 보면, 이에 해당되는 사람은 0.17%다. 애초 ‘8800만원 이상’을 주장하던 민주통합당이 수정해 내세운 ‘2억원 이상’의 경우도 0.35%만 해당될 뿐이다. 미국 버핏세는 1억2000만원 초과 때 적용되고, 0.56%의 사람들이 해당된다.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스트 공약이 난무한다고 하지만, 보수정당은 본능적으로 부자증세에는 제동을 걸게 되나 보다.
그래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오바마에게서 ‘포퓰리스트적’ 냄새를 맡는 건 맘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한국판 버핏세’ 등을 내세우는 우리 정당들은 차라리 좀더 포퓰리스트적이 됐으면 좋겠다.
권태호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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