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12 19:09
수정 : 2012.01.1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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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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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돌리는 유권자들 향해
공화당은 절로 변하고 있다
10일 미국 공화당 뉴햄프셔주 예비선거(프라이머리)가 끝난 뒤, 론 폴 텍사스 하원의원이 지지자들 앞에 섰다. 76살의 노의원은 23%라는 꽤 높은 득표율에 고무된 듯 상기된 표정이었고, 양쪽 뺨에는 홀을 가득 메운 열기에 땀이 흘렀다. 폴은 “그들이 우리더러 ‘위험하다’ 할 때, 난 웃고 만다. 하나 그들이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말했다. 우리가 현상유지에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나와 여러분은 앞으로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외쳤다. 대부분 20~30대 젊은층인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론 폴, 론 폴”을 연호했다. 1등 같은 2등이었다.
철저한 리버테리언(자유방임주의자)인 폴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폐지, 군산복합체가 주도하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을 포함한 모든 전쟁 중단, 이스라엘 지원 중단, 해외주둔 미군 철수 등을 주장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와는 정반대일 뿐 아니라,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보다 더 나갔다.
지난 3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폴의 연설에는 입구부터 대부분 20살 안팎의 젊디젊은 대학생들이 하얀색 지지 티셔츠를 입고 축제에 온 듯 뛰어다녔다. 강당에 그득 찬 고등학생들도 폴의 한마디 한마디에 “고, 고, 폴”이라고 외치는 등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았다. 밋 롬니가 공화당 경선에서 1위를 질주하고 있지만, 20대에선 폴의 인기가 압도적이다. 30살 이하(18~29살) 연령층 투표율을 보면, 아이오와에선 48%, 뉴햄프셔에선 47%가 폴에게 몰표를 줬다. 처음 ‘독불장군’, ‘괴짜’ 등으로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미국 언론들도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지만, 그의 주장과 지지자들의 열성 등은 점점 무시하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폴은 35년 전부터 지금의 주장을 반복했고, 4년 전 공화당 경선에도 출마했다. 그때는 아무도 주목 않다가 지금은 이처럼 큰 반향을 낳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다. 아이오와에서 그가 얻은 21% 지지는 4년 전의 2배다. 뉴햄프셔에선 23% 득표율을 거뒀는데, 4년 전에는 3%였다. 폴의 부상은 재정적자와 실업난에 시달린 미국민들의 심정을 반영한다. 폴의 핵심 지지층이 실업난에 가장 민감한 20대와 은퇴자 등이다.
이런 폴과 정반대 편에 서 있는 공화당 후보가 릭 샌토럼 전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이다. 그는 기독교 복음주의 바탕 위에 보수적 ‘가족 가치’를 강조한다. 캠페인 구호에는 ‘가정이 필요해’가 있다. 2008년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한 마을이 필요하다”며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것과 대조된다. 그는 7남매를 뒀다. 또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숨진 아들 ‘가브리엘’의 시신을 집으로 데려와 형제들과 인사를 나누게 한 뒤 떠나보낸 사연이 아내 캐런의 책 <가브리엘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지면서 전통 보수주의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샌토럼이 급부상한 것을 그저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의 추락에 따른 어부지리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경기침체기에 ‘결국 가족뿐’이라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러드는 미국인들의 처지와 영화로웠던 과거로 돌아가고픈 애절함마저 느껴진다.
폴과 샌토럼이 후보가 못 되더라도, 이런 배경과 이들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모르몬교에 중도 색채의 롬니가 공화당에서 파죽지세를 보이는 것도 이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다. ‘누가 더 보수냐고? 그게 중요해?’라는 현실론의 득세다. 끝없는 경기침체와 지루한 정치적 분열 앞에 등 돌리는 유권자들을 향해 공화당은 이처럼 절로 변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한나라당이 정강에서 ‘보수를 빼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으로 날밤 지새우는 걸 미국 공화당 현장에서 보니 퍽 여유롭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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