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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15 19:17 수정 : 2011.12.15 19:17

정남구 도쿄 특파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모든 게 원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경북 성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절 먹고살기 위해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왔다. 그는 거기에서 1945년 해방을 석 달 앞두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를 바로 호적에 올렸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지금까지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아내도, 세 아들도 모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한국에 갈 수 없는 신세다.

일본 지바현 마쓰도시에 사는 곽수호(호적명 곽수남)씨 이야기다. 그는 2009년 12월 고향에 가기 위해 영사관에 여권 갱신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했다. 이유는 밝힐 수 없다면서, 일회용 여권을 줄 테니 한국에 가서 정식 여권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신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포기했다.

곽씨는 여권 갱신발급을 거부당한 이유를 짐작한다. 정부가 자신을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옛 이름은 한민통)에서 오래 일했다. 지금은 고문으로 물러나 있지만, 올해 1월까지는 상근 부회장을 지냈다. 이 단체가 반국가단체라면 그는 거의 수괴급이다.

이 단체가 왜 반국가단체인지 그는 이유를 모른다. 사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는 한통련이 북한으로부터 돈을 지원받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규정은 1978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김정사씨에 대한 법원 판결문에 갑자기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한다. 김정사씨는 최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재심 법원은 한통련이 반국가단체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곽씨는 1966년과 68년 한국을 방문하고는 자신이 한국인임에 눈을 떴다. 그래서 22살 때부터 민단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단 민주화 싸움으로 갈라선 뒤엔 한통련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은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정권의 비상계엄 선포로 국외망명 생활을 하게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단체다.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7월6일 미국 워싱턴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 나흘 뒤 일본을 방문해 한민통 의장으로 취임하기 5일 전인 8월8일 납치를 당하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나중에 이 일로 반국가단체 수괴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는 대통령이 되었다. 한통련에 대한 족쇄도 풀리는 듯했다. 1978년 이후 한국 방문을 못하던 곽씨도 2003년 9월 한통련 간부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물론 이때 여권도 발급받았다. 그는 2004년에도 한국에 갔다. 1990년 100명이 북한을 방문했던 한통련이 2007년에는 간부 50여명이 참가한 연수회를 제주도에서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모든 게 원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일곱이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다. 다만 이제라도 아버지 고향에 들러 조상 제사에도 참가하고, 아직 일본에 있는 부모님 유해를 어디에 모실지도 상의하고 싶다고 했다. 비록 2003년부터 몇 차례 한국에 갔지만, 사적인 일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생을 민주화·통일 운동을 해온 데 대한 자긍심을, 여권을 받기 위해 버릴 수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타향 사는 이들에겐 고향 쪽으로 날아가는 새만 봐도 눈물이 나는 세밑에, 그가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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