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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0 20:31 수정 : 2011.11.10 20:31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하면?

성 김 주한미국대사가 10일 부임했다. 그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6자회담 특사로 여러 차례 서울을 방문했지만, 이번 서울행이야말로 진정한 ‘귀향’이라 하겠다. 1974년 갑자기 미국 이민을 떠나야 했던, 영어도 못했을 중학교 1학년 소년이 37년 만에 주한 미국대사로 돌아왔다. 주일 공사였던 부친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옷을 벗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김 대사는 4일(현지시각) 국무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두 딸이 이번 학기를 마칠 때까지 당분간 ‘기러기’ 생활을 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처음 갈 땐 가족이 같이 가려 했기 때문에 부임 때 함께 갔다 아내와 두 딸은 워싱턴으로 곧바로 온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갈 땐 가족이 함께 간다”고 마음먹었을 그의 다짐이 아픈 가족사와 겹쳐졌다.

주한 미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결정적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빛보다 그림자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장면 총리가 밤중에 미국대사관저로 달려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당시 새뮤얼 버거 대사는 친미정권 수립을 전제로 쿠데타를 인정하는 미 정부의 의사를 쿠데타 세력에 전달했다. 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2·12 사태 이후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를 여러 차례 만나 지지를 부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을 묵인했다는 의혹에서 지금도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4·19 혁명 직후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하야를 촉구(월터 매카너기)하거나,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김 전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거나(필립 하비브), 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부의 군사행동을 제어(제임스 릴리)하는 등 파국을 막는 역할을 한 주한 미대사들도 적지 않다.

전임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가 주한 미대사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줬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민들은 ‘주한 미대사’라고 하면 고압적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지난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한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한 사실관계와 과학에 대해 좀더 배우길 바란다”고 훈계를 늘어놓는가 하면,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합의에 반대하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등 외교 관례를 무시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또 수많은 한국 정치인들이 주한 미대사 앞에만 서면, 온갖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얘기해 주느라 정신이 없고 대통령의 친형이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라고 이야기하니, 주한 미대사가 그러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성 김 대사는 “한국민들이 제게 너무 기대감을 갖고 있어 부담스럽다”고 솔직히 말했다.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하면’이라는 물음에 “미국 국익이 한국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영역, 국방 영역에서도 돈이 관련된 사안에서 미국과 한국의 국익은 수없이 충돌하고 있다.

성 김 대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하는 미국 대표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에게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더라도 한국의 국익을 다른 대사들보다 조금 더 생각해주길 바라는 인지상정까지 과하다 할 순 없을 것이다.

덕수궁과 붙어 있는 주한 미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는 1884년 미국이 조선 왕조로부터 사들인 곳으로, 주한 외국 대사관저 중 한국 고유 가옥 형태를 지닌 유일한 곳이다. 관저의 리셉션 룸 난롯가에는 한자로 ‘평안할 녕(寧)’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 손님들에게 “평안히 있다가 가시라”는 따뜻한 뜻인 것 같다. 성 김 대사가 한국민들을 이리 대해주길, 또 워싱턴으로 돌아갈 때 그가 한국민의 따뜻한 박수를 받기를 바란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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