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03 19:29
수정 : 2011.11.0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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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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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 전체의
그림을 그린 그가
공장 준공을 앞두고
거물 간첩이 됐다
지금은 포스코로 이름이 바뀌고 지분도 절반이나 외국인에게 넘어갔지만, 그 전신인 포항종합제철은 한때 이름만으로 한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존재였다. 이 회사는 한국이 공업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척추뼈 같은 구실을 했다. 영일만의 모래바람과 싸운 창업기 직원들의 분투 이야기는 몇번을 들어도 감동적이다. 그런데 그 포스코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온갖 차별과 착취를 당하고, 목숨까지 희생된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값, 일본에 남은 동포들을 ‘나 몰라라’ 하고 받은 바로 그 돈으로 포스코는 만들어졌다.
포철 설립 과정에서 우리는 한 재일동포 공학자에게도 큰 빚을 졌다. 김철우(85) 박사다. 도쿄공업대학과 도쿄대 대학원을 나온 그는 재일동포로서 첫 일본 공무원(도쿄대 연구교수)이 된 인물이다. 동포들의 자랑이요 희망이었다. ‘쇠밖에 모르던’ 그는 1968년부터 한국의 제철소 설립과 관련해 온갖 조력을 했다. 1970년부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중공업 연구실장을 맡아 제철소 전체의 그림을 그렸다. 포철 1호기 용광로를 사실상 설계한 게 그였다. 1971년부터는 포스코의 간곡한 요청으로 도쿄대를 휴직하고 기술담당 이사로 공장 설립을 이끌었다. 포스코의 사료박물관엔 당시 그의 역할을 보여주는, 박태준 사장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지금도 여러 통 보관돼 있다.
하지만 그는 1973년 공장 준공을 한달여 남겨두고 갑자기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해 6월5일치 신문은 그를 ‘기간산업에 침투한 거물 간첩’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얼마 뒤 그를 만나러 서울에 온 동생(홋카이도대학 조교수)을 포함해 4개망 간첩 11명을 보안사가 체포했다는 기사도 신문에 났다. 그는 결국 간첩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6년 반을 복역했다. 일본의 지식인들과 재일동포들의 무죄 탄원이 큰 물결을 이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신헌법이 공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석방 뒤 도쿄로 돌아왔다가 1980년 영구귀국했다. 포스코에서 부사장 대우로 일했고, 지금도 한국 중소기업들을 도우며 지낸다. 과거를 기억에서 많이 지워버린 그를 나는 도쿄에서 몇차례 만났다. 그는 1970년 분명 북한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의 큰형을 비롯한 ‘귀국선’을 탄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이의 꼬임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에게 형제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다. 물론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북한에 갔던 사실은 몇가지 살만 덧붙이면 산업계에 침투한 간첩으로 만들어내기 딱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서 손목의 동맥을 잘라 자살을 시도했다. 그때 살아난 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재일동포들 가운데는 그와 비슷한 불행을 겪은 이가 적지 않다. 약 160명이 간첩으로 몰려 인생이 망가졌다. 일본에서 차별받고 조국에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독재정권 유지의 희생양까지 됐다. 몇해 전부터 그들이 하나둘 재심을 신청했고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10명의 재심이 개시돼, 그 가운데 5명은 이미 무죄를 선고받았다. 상식의 눈만 열고 있어도, 진실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형제를 만나러 북한에 다녀왔다는 것과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김철우 박사에게도 법원이 하루빨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고, 진실을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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