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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20 19:23 수정 : 2011.10.20 19:23

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감세에 환호하고 야구에만 열광하고
<폭스뉴스>만 보던 그들은 책임 없나

빌 헤네시(64). 지난 15일 미국 뉴욕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의 시멘트 바닥에 앉아 점심 삼아 빵조각을 씹고 있다. 컴퓨터회사 영업사원이던 그는 2009년, 25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다. 전체 직원의 8%인 1000여명, 그중 헤네시도 있었다. 그는 현재 매달 1500달러의 연금을 받는다. 그런데 뉴욕에 사는 탓에 한 달 집세가 2700달러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집 판 돈으로 메운다. 20년 전 집을 살 때는 평생 살 집이라 생각했다.

그는 평생 시위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요즘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와 물끄러미 리버티 플라자에 앉아 있다 저녁이 되면 돌아간다. 늙은 헤네시의 저항이다. 헤네시는 “은퇴해도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성을 밝히지 않은 숀(30). 4년 전 코네티컷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코네티컷대는 미국 동북부 지방 공립학교 1위인 대학이다. 그는 전공을 살려 정부나 의회, 연구소 등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폼나는’ 일자리는 없었다. 그사이, 결혼해 아이가 벌써 둘이다. 가게 점원, 날품팔이 등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이젠 동네 서점에서 일한다. 그사이, 이혼했다. 그의 월급은 1500달러, 의료보험은 없다.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 집에 얹혀산다. 주말마다 뉴욕에 와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숀은 “복지제도가 제대로 된 북유럽 시스템을 채택했으면 한다”고 했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보기 힘들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지만 지금까지 사회적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민자로 구성돼 무한대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라인데다 개인주의에 바탕한 자유시장경제이기에 사회 구성원들이 ‘규칙’과 ‘공정성’에만 주목했을 뿐, 빈부격차 상황 자체에는 무덤덤했다. 땅덩이가 넓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아예 서로 딴 세상에서 살아 평생 마주치기도 힘들다. 그래서 위화감도 덜 느끼는 것 같다.

무엇보다 비록 부자가 되진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뉴욕 바닥에서 아등바등 살 것인가, 아니면 주립대학 나와 고향에서 큰돈은 못 벌어도 그저 맘 편히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 이전에도 빈부격차가 심했던 미국에서 인종갈등은 있어도 계급갈등은 크게 일지 않았던 이유다.

그런데, 이젠 이런 선택이 힘들다. ‘아메리칸드림’은 고사하고 ‘평범한 삶’도 힘들어지면서 미국인들이 뒤늦게 각성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통계자료를 읊을 필요도 없이 부자는 끝없이 부유해지고, 빈자의 삶은 계속 피폐해져 간다. ‘금융위기 때문’, ‘세계가 다 그렇다’는 변명이 통하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금융·기업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몇푼 안 되는 감세에 환호하고, 빚내서 산 집의 값이 오르면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사회에 대해선 무관심한 채 월드시리즈, <스타와 함께 춤을>에만 열광하고, 뉴스는 보기 쉬운 <폭스뉴스>만 고르던 평범한 미국인들도 그저 면죄부를 받긴 힘들 것이다.

많은 사람이 두루 잘 먹고 잘 사는 게 역사의 발전일 것 같은데, 최근 상황을 보면, 아바의 노랫말처럼 ‘더 위너 테이크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이 시대정신인 것 같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 했는데, ‘월가 점령 시위’가 견고한 성을 향한 가련한 ‘도전’인지, 야만의 시대에 맞서는 용감한 ‘응전’인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그 진보는 ‘두루’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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