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29 19:23
수정 : 2011.09.2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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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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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을 하는 이란 출신 이민자도
앞뒷마당 잔디 깔린 단독주택에 산다
미국의 신문·방송에서 좋은 뉴스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빈곤율 사상 최고, 대량해고, 복지분야 재정 삭감 등 서민을 힘들게 하는 소식뿐이다. 미국인들의 삶은 끊임없이 팍팍해지고 있다.
요즘 한국 관광객들은 “미국이 별로 잘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많이 한다. 종종 동의한다. 미국에서 재정사정이 가장 나은 편인데도 워싱턴 인근 고속도로는 정비가 안 돼 지날 때마다 비포장도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울퉁불퉁하다. 집 근처 어린이 야구장 6개와 축구장 1개가 구비된 체육공원에선 올해부터 평일 밤에는 전광판을 켜지 않는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새 학기 들어 학생 수가 부쩍 늘었는데, 인근 초등학교를 폐쇄하면서 그쪽 학생들이 주변 학교로 흩어진 탓이다. 스쿨버스 운행 대수를 줄여 지난해엔 절반만 찼던 스쿨버스가 이젠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둘러 오느라 통학시간도 10분 이상 길어졌다. 통행료를 걷는 도로가 늘어나고, 지하철·전기·우표 등 온갖 공공요금이 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삶을 볼 때 ‘그래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직은 많다. 지난해 미국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만7140달러로, 우리나라(2만759달러)의 2배가 넘는다. 우리보다 외식은 많이 안 하지만, 훨씬 많이 여행 다니고, 캠핑·낚시 등을 즐긴다. 소비성향도 우리보다 훨씬 높다.
생필품 물가, 사교육비, 집값 등은 서울과 비교할 수도 없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가 미국에서 부자 기준으로 설정한 ‘부부합산 연소득 25만달러’(2억9425만원) 가정(취학 전 자녀 1명, 취학아동 1명)의 평균 가계부를 보여줬다. 이 가정의 연간 사교육비는 미취학 자녀 보육비(1만5000달러), 취학아동 방과후 활동비(4000달러) 등 모두 1만9000달러였다. 미국도 사교육비가 늘고 있지만, 연간 3억원을 버는 가정이 취학아동에게 쓰는 사교육비가 월 40만원이 안 된다.
집 부근에 이란 출신 이민자 가정이 사는데, 여느 중산층 가정처럼 방 4개에 2층과 지하실, 잔디 깔린 앞뒷마당 딸린 단독주택에 산다. 아내는 전업주부이고 남편은 택시운전사다.
누더기가 되었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부러운 게 복지제도다. 미국은 형편없는 의료보험 제도를 65살 이상(메디케어)과 저소득층 가정(메디케이드)에 제공하는 공공의료로 보완한다.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혜택은 계속 줄고 있지만, 사라지진 않는다. 또 실직하면 99주 동안 실업수당을 준다. 노인들은 젊을 때 자신이 낸 사회복지세를 근거로 은퇴한 뒤 평생 사회복지연금을 받는다. 평생 실직자로 살아도 65살이 되면 한달에 650달러 정도의 생활비를 받는다. 물론 앞으로 계속 줄 것이다. 대학 등록금은 외국인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3~6배이고 해마다 가파른 속도로 올라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 자녀는 각종 할인·장학금·대출이 많아 대학 문이 원천봉쇄되는 경우는 없다. 내가 아는 한인 이민자 가정의 큰딸은 지난해 듀크대 의대에, 작은딸은 명문 주립대에 진학했다.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일하는 이 가정의 연소득은 5만달러 정도다. 이 한인은 첫딸의 학비로 연간 2000달러 정도만 냈다. 두 딸의 대학 진학 전과 후에 가정살림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반의 반값 등록금을 냈으니까.
미국은 유럽에 비해 복지제도가 부실한 나라로 손꼽힌다. 선거를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또 복지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산꼭대기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매표소 입구에 막 들어온 등산객이 듣고선 “다들 내려가니 우리도 내려가자”고 고함지르는 일 없기를, “미국이 복지병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만 들었으면 한다. 망하지 않았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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