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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15 19:18 수정 : 2011.11.21 15:49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노동운동 싹트는 중국 노동자에게도
전태일은 어렴풋한 희망의 이름이다

“취안타이이, 잘 알아요.” “그의 죽음이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됐잖아요.”

지난해 말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의 공장지대를 취재할 때 만난 젊은 ‘농민공’들은 전태일을 이야기했다. ‘취안타이이’라는 낯선 중국식 발음이었지만, 전태일의 삶은 그들에게 낯설지 않았다.

중국 수출산업의 중심지에서 이제 막 싹트고 있는 풀뿌리 노동자 단체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한 젊은이들, 공장일이 끝난 뒤 이곳에서 노동법을 배우고 책과 신문을 읽으며 자신의 처지를 자각해가는 이들, 기계에 손가락 4개가 뭉텅 잘려나간 노동자에게 ‘취안타이이’는 어렴풋한 희망의 이름이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에 돌아가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중국의 차별받는 농민공들에게도 당신의 아들이 변화의 꿈을 주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멀리서 들으며 더욱 아쉬움이 컸다. 중국 농민공들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는 아마도 ‘우리 아들의 이야기,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라며 이들을 꼭 안아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한국 비정규직과 중국 농민공들을 보면, 두 나라가 앓고 있는 공통의 만성질환이 보인다. 한국과 중국 모두 수출과 부동산 거품에 의지해 성장하면서, 비정규직과 농민공이란 ‘낙인’이 찍힌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이윤을 쥐어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해 왔다. 선진국의 부유한 소비자들이 끝없이 물건을 소비해 주리라 믿었기에, 국내 노동자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구매력이 떨어지는 현실은 안중에 없었다.

한국에서 계약직·파견·용역 등 갖가지 이름으로 비정규직의 위치를 강요당한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기업에는 막강한 경쟁력이 된 것처럼,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농민공의 상상을 초월하는 저임금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몇년 전 남미 콜롬비아의 청바지공장을 취재하러 갔을 때 그곳 사장은 “중국산 저가 제품 공세에 버틸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며 “우리도 이렇게 가난한 나라인데, 중국은 어떻게 우리보다도 훨씬 낮은 임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중국 농민공들은 농민 호구(戶口·후커우)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보장에서 배제되고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 현실이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중국 국가통계국 통계에서 2009년 농민공은 2억3000만명, 평균 월급은 1417위안(약 24만5000원)이었다.

기자가 사는 베이징 시내 아파트 한켠에선 24시간 공사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새벽 2~3시에도 불을 밝혀 놓은 채 농민공들이 쉼 없이 움직인 결과 기반 공사만 돼 있던 땅 위에서 몇달 만에 이십몇층짜리 새 아파트 두 동이 뚝딱 일어섰다. 중국 곳곳에 들어선 휘황한 건축물, 도로, 다리, 고속철이 이런 가혹한 노동을 통해 지어졌다. 정부와 도시 중산층은 농민공의 저렴한 노동력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가난하고 후줄근한 모습을 혐오하고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을까 우려한다. 8월 말 베이징시가 인구 유입 억제를 내세워 농민공 자녀 학교 30곳을 갑자기 철거·폐쇄해 어린이 3만명이 학교를 잃은 사태는 이런 현실을 상징한다.

이런 차별에 우리 모두 익숙해지고 공범이 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 시장이 갑자기 중태에 빠졌고 한국과 중국 모두 마음이 급해졌다. 중국 지도부가 12·5 계획과 ‘포용성 성장’ ‘공동부유’ ‘내수 확대’를 주문처럼 외치고, 한국 정치인과 기업들도 보편적 복지니 동반성장이니 수많은 구호를 내놓는다. 이런 야단법석에 대해 묻자, 한 중국 노동자는 “정부는 입만 움직이는 게 문제”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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