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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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봄은 화사한 벚꽃과 잔디밭을 노랗게 뒤덮은 민들레가 잘 알려준다. 민들레를 그냥 두면 잔디를 다 상하게 해 미리 뽑아야 한다. 겉보기엔 하늘하늘한 민들레의 뿌리는 생각보다 두텁고 깊어 캐내려면 꽤 애를 먹는다. 워싱턴과 인접한 버지니아주의 로버트 맥도널 주지사(공화당)가 최근 4월을 ‘남부연합 역사의 달’로 선포했다. 남북전쟁 당시 연방정부에 대항해 독립을 선언했던 ‘남부연합’(Confederation)을 역사적으로 기리자는 것이다. 맥도널 주지사는 내년 남북전쟁 150돌을 앞두고 역사관광 촉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지니아에는 곳곳에 남북전쟁 유적이 많고, 주도 리치먼드는 남부연합의 수도였다. 그런데 맥도널 주지사는 남북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노예제’를 전혀 언급 안 해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과 흑인·인권단체의 비난이 쏟아졌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적했다. 맥도널 주지사는 7일 뒤늦게 “노예제도를 언급 않은 건 실수”라며 “노예제는 미국을 분열시키고, 사악하고 잔인한 관행으로, 버지니아와 미국의 영혼에 얼룩을 남겼다”고 말했다. 미 정가에선 맥도널 주지사가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의로 논란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남북전쟁(1861~65년) 전사자는 모두 62만명. 1차대전(11만명), 2차대전(40만명), 한국전(3만명), 베트남전(5만명) 등의 미군 전사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그만큼 상흔이 깊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청사에는 지금도 성조기와 함께 남부연합 깃발이 걸려 있다. 타이거 우즈의 불륜 사건 때 융단폭격하듯 퍼붓는 비난과 조롱을 보며 ‘과연 그가 백인이었어도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난 2004년 미국 연수 시절에는 텔레비전만 틀면 ‘마이클 잭슨, 어린이 성추행 의혹’ 사건이 뒤덮었다. 흑인 유명인사들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백인 아내 살해 혐의를 받은 ‘오제이 심슨’ 그림자를 은연중 어른거리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다.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 추진이 발단이 돼 미 전역에 거대한 보수주의 물결인 ‘티파티’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갈 때도, ‘만일 오바마가 백인이었어도’라는 가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근 미국 사회가 진보·보수 양쪽으로 나뉘어 타협 없는 다툼을 벌이는 원인의 상당 부분은 ‘오바마가 흑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바마가 지난해 9월 데이비드 레터먼이 진행하는 토크쇼에서 “나는 대선 이전에는 흑인이었다”고 한 말은 미국 사회를 향한 아픈 농담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분명 변하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 흑인뿐 아니라 히스패닉·동양인 등 비백인들의 비중은 점점 늘어나고, 흑백 커플을 봐도 예전처럼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는 이도 없다. 미국의 인구구성에서도 백인은 이제 절대다수가 아니다. 미국의 보수화 물결은 어쩌면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일지도 모른다.
마이너리티의 힘이 점점 커지는 미국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올린다. 그러나 미국과는 달리 소득, 학벌, 외모, 지역 등에서 한국 마이너리티들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는 것만 같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마이너리티들은 보수적 경향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환경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종’이란 거부할 수 없는 마이너리티 속성과 달리, 메이저로의 등극이 가능한 ‘개천의 용’에 대한 개인적 기대감도 한몫할 것이다. 보수정당이 진정 장기집권을 원한다면, 역설적으로 그 ‘기대감’을 아예 접지 않도록 더 힘써야 할 터인데…. 권태호 특파원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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