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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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참 무섭고 무겁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의 상징인 난징과 뤼순을 취재하는 내내, 치열하게 역사를 기억하는 데서 나오는 중국의 힘을 실감했다. 난징에서 밀려드는 인파에 끼여 한참 줄을 선 뒤에야 난징대학살기념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민간인 30만명을 학살한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 6주 동안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는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생매장, 구덩이에 몰아넣고 불지르기, 민간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 총알의 관통력 테스트하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 3개월 된 아기까지 무차별 학살했고,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한 뒤 기념사진도 찍었다. 일본의 우파들은 이 모든 것이 허구 또는 과장이라며 발뺌하려 애쓰지만, 중국은 당시의 사진과 일본 언론의 기사, 생존자들과 유가족의 방대한 증언 등을 모아 놓은 이 기념관을 통해 역사를 지우려는 일본의 시도를 헛수고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끔찍했던 건 만행이 벌어지는 동안 난징 현지를 취재하던 일본 특파원들이 폐허가 된 난징 시내에서 환하게 웃으며 찍은 기념사진이다. 12초에 한명꼴로 학살당하는 동안 이들은 당시 난징의 민간인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일본군을 환영하고 있고, 일본 병사들이 난징의 민간인들을 얼마나 자애롭게 돌보고 있는지를 선전하는 기사들을 계속 써 보냈다. 민간인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에는 ‘보도 불가’라는 검열당국의 붉은 도장이 찍혔다. 잔학행위는 스포츠를 중계하듯 경쾌하게 보도했다. “105 대 106”, 일본군 소위 둘이 한나절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내기를 해 한명은 105명, 한명은 106명을 죽여 승자를 가렸다는 당시 특파원의 기사는 이제 사료로 기념관에 큼지막하게 전시돼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권력을 쥔 승자들은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국민을 속이고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고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부끄럽게도 많은 언론이 현실론에 굴복해 공범이 되는 길을 택한다. 현재의 한국은 그 함정에서 자유로운가?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기 직전 새 임시수도 충칭으로 피신했다가, 학살이 휩쓸고 지나가고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45년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난징의 총통부에 돌아오는 모습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결국 중국 대륙을 빼앗김으로써 역사의 대가를 치렀다. 난징 시민 리싱은 “국민당과 장제스 역시 난징 역사의 일부분이지만, 난징 사람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동안 장제스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일본의 36년 식민통치를 겪었던 우리 민족 역시 난징에서 6주 동안 벌어진 학살보다 훨씬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고 역사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남기려는 우리의 노력이 그만큼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고 답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에서 안 의사가 31년의 짧은 생애를 불살라 나라를 구하려 애쓰는 동안 당시의 권력자들은 어디 있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파들은 계속 일본과의 합방을 청원하는 상주문을 올려 국가를 일본에 넘기라고 재촉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뒤에는 조선대표 도일사죄단을 보내고 국장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설명한다. 박민희 특파원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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