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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5 20:27 수정 : 2010.01.26 01:05

박민희 특파원

중국 현대사에 ‘최우수 조연상’이 있다면 공자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중국 역사의 대부분 동안 사상의 왕좌를 차지했던 공자(기원전 551∼479)는 중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변신했다. 19세기 말부터 서구 열강들의 가공할 군사력과 기술 앞에 무릎을 꿇고 종이호랑이가 된 중국을 보면서, 중국의 열혈 애국 청년들은 공자와 유교를 중국 사회를 옭아맨 망국의 근원으로 보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 현실에 절규했다. 20세기 초 소설가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유교의 가치를 맹신하는 중국의 전통사회를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로 묘사했다.

공자의 처지가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른 것은 1973년 문화대혁명이 “비림비공”(批林批孔)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였다. 마오쩌둥이 총애하는 2인자이자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배반자로 몰리면서, 공자는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지목됐고, 린뱌오는 공자를 숭배하며 혁명을 배반하고 지주 자산계급의 전제를 되살리려 했다고 공격받았다. 공자와 유교의 유산들이 홍위병들의 공격 앞에 부서지고 무너지고 불탔다.

공자의 고향, 산둥성 취푸(곡부)의 거대한 공자 사당인 공묘에는 베이징 자금성의 것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용조각 기둥들이 늘어서 중국 봉건사회를 지배했던 이 사상가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당 한켠에는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에게 맞아 중상을 입었던 비석들이 곳곳에 덕지덕지 발라진 시멘트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공자의 비참했던 운명의 증인으로 서 있다.

개혁개방과 함께 공자는 폐허에서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경제개발이 지상의 구호가 되자, 공자와 유교는 사회주의 이념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중화문명과 중화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상징으로 다시 불려나왔다. 중국 정부는 ‘소프트파워’ 전략의 핵심으로 전세계에 500곳이 넘는 공자학원을 세우며 중화문화 보급에 나섰다.

올해 공자는 다시 한번 중국과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중국 당국이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 2D판의 상영을 중단시켰으며, 22일 개봉한 애국적 국산 영화 <공자>가 더 많은 상영관에서 관객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처라는 뉴스 때문이다. <공자>는 중국 전체 스크린 4700개의 절반이 넘는 2500여개 스크린을 점령한 채 개봉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콩 배우 저우룬파(주윤발)가 공자로 등장한 이 영화는 공자를 사상가라기보다는 난세의 중국을 위해 분투하는 전략가이자 영웅으로 묘사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이자 베이징시 정협위원이기도 한 이 영화의 감독 후메이는 최근 <남방주말> 인터뷰에서 “공자가 추구했던 대동사회는 현재 중국이 추구하고 있는 조화사회가 아니겠느냐”며 이 영화의 정치적 의미를 털어놨다.

중국 현대사에서 공자에 대한 평가에는 항상 ‘중용’이 부족했다. 봉건통치와 억압의 상징으로 유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공격할 때도, 현재처럼 중화문명의 위대함과 권력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부활시킬 때도 정치적 목적과 얽힌 극단적 비판과 숭배가 요란했고, 시대 상황 속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비판하는 주체적 목소리는 가려지곤 했다.

천하를 떠돌며 바른 정치를 강조하고 권력자에게도 비판을 서슴지 않던 공자, 사람이 어떻게 바르게 살지를 묻고 인과 예, 중용을 가르쳤던 공자를 중국은 현재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되살리고 있는가? 2500년 전의 사상가 공자는 정부의 구호인 ‘조화사회’ 이념의 영웅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현재의 공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민희 특파원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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