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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2.24 11:59 수정 : 2011.02.24 11:59

디스크필름의 탄생 그리고 소멸

[매거진 esc] 카메라 히스토리아

현상 타이머, 현상 탱크, 릴, 필름 로더, 필름 피커…. 모두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직접 필름을 현상하고 암실에서 인화지를 꺼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집에 암실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5~6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필름 현상을 하곤 했다. 코닥 D76(현상제) 분말을 정확한 온도에 맞춰 물에 녹여 1갤런(3.8ℓ)의 원액을 만드는 것부터 마지막으로 화장실 수건걸이에 집게를 달아 필름 말리는 일까지 필름 현상은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상이 끝난 필름을 스캔하는 일은 현상만큼 더디고 힘들었다. 한 롤 36장 가운데 잘 찍힌 사진을 한 장이라도 건진다면야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람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을 때도 많았다.

필름 현상하는 법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손끝의 감각만으로 ‘암백’(빛을 차단한 검은 가방) 속에서 필름을 릴에 감는 일이었다. 스테인리스강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릴은 현상 탱크에서 필름이 겹치지 않고 골고루 현상액이 스며들도록 해주는 구실을 한다. 매거진 속에 돌돌 말려 있는 필름을 빼내 릴에 감을 때는 신경을 손끝에 집중해야 했고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 실수도 많았다. 실수를 할 때마다 왜 필름을 말아놓은 형태로 만들어 고생을 하게 만드나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필름 제조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필름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닌 콤팩트디스크처럼 둥근 형태였다면 어땠을까. 가장 먼저 디스크 형태의 필름과 카메라를 만들어낸 인물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조수로 일했던 윌리엄 딕슨이었다. 그는 1893년 포토렛(Photoret)이라는 주머니용 회중시계 크기의 작은 카메라를 만들고 그 안에 6장을 촬영할 수 있는 원형 필름을 넣었다. 세월이 흘러 1940년 엔지니어였던 제임스 딜크스가 디스크카메라에 대한 미국 특허를 얻고, 자이렉스(Gyrex)라는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대량생산으로 이어지진 않았다.(제임스 딜크스는 자이렉스를 코닥에 넘기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인 1950년 면도날을 만들던 회사 에이에스아르(ASR)가 포토디스크(Fotodisc)라는 카메라를 출시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원형 필름을 대량생산했던 회사는 딜크스의 아이디어를 버렸던 코닥이었다. 1982년 코닥은 실제로 디스크필름과 디스크카메라를 선보였다. 코닥이 디스크필름을 만든 이유는 대량의 필름을 한꺼번에 현상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롤필름은 현상기에 넣어야 할 경우 하나씩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디스크필름은 가운데 뚫린 구멍을 이용해 금속막대에 차곡차곡 끼울 수 있어 간편하게 더 많은 양의 필름을 현상할 수 있었다. 디스크필름의 또다른 장점은 카메라를 ‘콤팩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디스크필름 크기는 지름 65㎜, 두께 0.18㎜에 불과했다. 코닥은 디스크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디스크 4000, 6000, 8000 등 3가지의 새로운 카메라를 함께 출시했다. 디스크 4000의 크기는 118㎜(가로)×78㎜(높이)×27㎜(너비), 담뱃갑보다 약간 큰 크기, 값도 67.95달러로 저렴했다. 디스크필름은 참신하고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롤필름을 위협하진 못했다. 디스크카메라는 1990년, 디스크필름은 1998년 생산이 완전히 중단됐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라도 때와 운이 따르지 않으면 빛을 보기 힘든 법이다.

글 조경국 카메라칼럼니스트·사진 출처 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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