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0.07 15:31
수정 : 2010.10.0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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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파의 시련, 웃을수도 울수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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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카메라 히스토리아
‘1997. 7’은 너덜너덜한 코닥 플러스엑스 팬(Plus-x Pan) 필름 종이 포장지에 적혀 있는 유통기한이다. 지금은 단종된 코닥 플러스엑스 팬은 후배가 집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필름카메라가 없다”며 내게 건네준 것이다. 넘겨받은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유통기한이 13년이 넘은 필름을 냉장고에 넣어두고(필름도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애지중지하고 있는 이유는 전장에서 마지막 총알을 아껴두는 병사의 심정이랄까. 더는 필름을 구할 수 없을 때 마지막까지 간직한 필름을 카메라(아마 니콘 F3가 될 테다)에 끼우고 하루 한 장씩 36일 동안 진지하게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이다.
필름을 만들던 회사들이 하나둘씩 사업을 접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했던 필름들이 어느 순간 ‘품절’로 뜰 때는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필름사업은 전세계 필름 판매량이 최고를 기록했던 2001년 이후 급격하게 사양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언제까지 필름을 구할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10년, 20년… 당장 사라지진 않겠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필름을 사용하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벌써 웬만한 필름들은 값이 뛴 지 오래됐다. 흑백필름 가운데 인기 있던 코닥 트라이엑스(Tri-x)는 이제 구할 수 없고, 그나마 생산되고 있는 코닥 티맥스(TMAX)는 한 롤에 7000원이 훌쩍 넘는다. 코닥뿐 아니라 후지, 일포드에서 나온 흑백필름들도 값이 몇 년 사이 상당히 올랐다. 슬라이드와 컬러 네거티브 필름도 마찬가지다. 필름을 살 때는 크게 심호흡 한번 해야 한다. 거기에다 현상비와 스캔비까지 생각하면 요즘은 필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다. 그래도 가끔은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이유는 디지털보다 사진 찍는 ‘손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물로 던져 고기를 잡는 쪽이 디지털이라고 한다면 낚싯대 드리우고 가만히 기다리는 쪽은 필름이랄까.
필름 값이 오른다고 사진찍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진가들이 택한 방법은 바로 ‘싼 필름 찾기’이다. 포장을 하지 않은 ‘벌크 필름’, 유통기한이 지난 ‘이월 필름’을 찾는 것은 기본이고 가격 저렴하고 품질 괜찮은 ‘변방 출신’ 필름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헝가리제 ‘포마’(FOMA)와 중국제 ‘럭키’, ‘상하이’가 들어온 것도 모두 필름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덕분이다.
페루츠(Perutz)도 1000원대라는 저렴한 가격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색감이 훌륭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이다. 페루츠는 독일의 유서 깊은 필름 생산회사였지만 1960년대 아그파에 합병되었다. 아그파에서 필름사업부만 따로 떨어져 나와 세웠던 아그파포토는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이미 2005년 파산했다. 1889년 최초의 흑백필름과 1936년 최초의 컬러필름을 개발했던 아그파의 기술과 저력을 믿었던 사람들은 파산 신청을 했어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100년 넘게 필름 시장을 주도했던 아그파도 디지털카메라의 파상공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영권이 이리저리 넘어가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론 아그파는 시장에서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는 코닥과 후지와는 반대로 저렴한 컬러 네거티브 필름만 내놓고 있다. 페루츠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아그파 필름의 일부분인 셈이다. 아그파가 겪고 있는 시련이 당장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주머니 가벼운 사진가에겐 도움이 되고 있으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글 조경국(카메라 칼럼니스트)<30FB>사진 제공 www.filmtou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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