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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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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카메라 히스토리아
연례행사처럼 새해가 되면 1년치 쓸 필름을 미리 사두곤 했다. 올해는 건너뛰었다. 필름을 사서 쟁여두는 일을 이제 그만뒀다. 2008년 사둔 40롤의 필름 가운데 절반도 쓰지 못했다. 남은 필름은 묵은 김치와 함께 냉장고에서 잠잔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기러기 아빠’의 불쌍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어서 “가족 곁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보다 “저 필름, 빨리 찍어야 할 텐데”라는 마음이 먼저 삐져나온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도 가방에 넣어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던 시절이 이제 내게는 ‘갔다’. 어느 순간 필름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필름카메라의 시대는 2000년을 정점으로 점점 막을 내린다. 2000년 필름 판매량은 7억8600만통이었지만, 2005년엔 3억1500만통에 그쳤다. 5년 사이에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필름 소비가 줄어들자 코닥, 후지, 아그파 등 필름 제조업체들도 덩달아 필름 사업부문을 축소하거나 없앴다. 2009년 6월22일 75년 역사를 가진 ‘코다크롬’(Kodachrome)의 단종 발표는 ‘아날로그 시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1935년 레오폴드 만스와 레오폴드 고도프스키가 함께 개발한 코닥 최초의 컬러 슬라이드 필름이었던 코다크롬은 20세기 내내 코닥의 대표 상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일반 필름카메라뿐 아니라 8㎜ 무비 카메라에도 사용됐는데, 1963년 11월22일 케네디 대통령 저격 장면이 담긴 동영상도 바로 코다크롬으로 촬영된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인물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가 스티브 매커리의 사진(1985년 6월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사진으로 실린 ‘아프간 소녀’ 샤르밧 굴라)도 코다크롬으로 찍었다. 코닥은 코다크롬 마지막 생산품을 스티브 매커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코다크롬’은 20세기를 기록한 ‘전설’ 그 자체였다. 컬러사진 시대를 열고 오랫동안 사진가들에게 사랑받았던 코다크롬이 정작 우리나라에선 1988년이 되어서야 현상이 가능했다. 서울 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온 외국 사진기자들을 위해 현상시설을 만든 것이 계기였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 코다크롬 현상시설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철수했다. 결국 국내 사용자들은 현상을 위해 이전처럼 일본이나 멀리 미국까지 코다크롬을 보내야 했다. 코닥 엑타크롬, 후지 벨비아 등 대부분의 컬러 슬라이드 필름은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은 ‘E-6’ 현상법을 이용하지만 코다크롬은 ‘K-14’라는 까다로운 현상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코다크롬은 색을 만들어내는 성분이 현상액에 들어 있어 색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현상기술이 매우 중요했다. 코닥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코다크롬의 단종 이후 수많은 필름들의 명맥이 줄줄이 끊어졌다. 그나마 생산되는 필름의 값도 많이 올랐다. 36장 필름 1통을 찍어 스캔 서비스까지 받는다고 하면 필름값과 현상비, 스캔비까지 포함해 1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래도 필름을 ‘죽도록’ 사랑하며 디지털로 전향하지 않는 아날로그 사진가는 수없이 많다. 그들은 1973년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엄마, 내 코다크롬 뺏지 마세요”라고 부른 노래(제목이 ‘코다크롬’이다)처럼 필름이 사라질까 두려울 뿐. 글 조경국 월간 <포토넷> 기자·사진 출처 www.kod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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