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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23 18:50 수정 : 2010.01.07 16:26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우리 동네 가까이에 사촌 누나가 살고 있어서, 이모가 가끔 지내러 오신다. 일흔이 넘은 이모는 내 손을 꼭 쥐며 세월이 흐를수록 제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고 신기해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얼굴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나랑 너무 달랐다. 말이 거칠고 고집이 센 것은 물론 계산기보다 더 빨리 암산을 하셔서, 구구단도 반에서 가장 늦게 외웠던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반면 책을 읽고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와 반대로, 아버지는 내가 보는 데서 신문조차 읽은 적 없을 정도로 활자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좁은 골목 중간에서 술집을 겸한 구멍가게를 하던 우리 집은 가끔 취객들이 난동을 부렸지만, 아버지는 특유의 배짱과 여유로 거뜬하게 해결을 보곤 하셨다. 그날은 일이 좀 심하게 벌어져서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게 되었고 취객들은 잡혀갔다. 경찰은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내밀면서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다. 어떤 큰일 앞에서도 작아지지 않던 아버지는 긴장하며 펜을 들었고,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이름을 적으셨다. 큰누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 나는 큰누나가 겁을 먹고 우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큰누나는 그날의 눈물에 대해서 얘기해주었다. 그때 아버지의 손이 떨렸던 건, 경찰이 앞에 있어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 손으로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서 그랬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가한 할머니에게조차 버림받아 어린 고모를 데리고 고아로 떠돌며 살았고, 당연히 학교 문턱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큰누나는 아버지가 이름을 쓰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고, 또 그런 아버지가 너무 안돼 보여서 울었다고 했다.


가슴 깊이 묻어도 바람 한 점에 떨어지는

저 꽃잎처럼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

돌아갈 수 있을까 날 기다리던 그곳으로

그 기억 속에 내 맘속에 새겨진 슬픈 얼굴

커다란 울음으로도 그리움을 달랠 수 없어.

(2003, 아버지, 김경호)

나는 지금에야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이 고인다. 이젠 돌아갈 수도, 보듬을 수도 없는 그 이름 아버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내가 꼭 닮은 데가 하나 있다. 드라마를 보거나 남들의 서러운 사연만 들어도 곧잘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지처럼, 나도 나이가 들수록 주책없이 눈물이 늘어난다. 아버지가 쓴 이름 석 자를 보며 큰누나가 눈물을 글썽였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쓰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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