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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9.09 18:55 수정 : 2010.01.07 17:19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나는 ‘춘천 가는 기차’를 싫어한다. 이유도 없이 떠남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싫고, 가본 적도 없는 춘천을 그리워하게 하는 낭만이 싫다. 편안하게 파고드는 김현철의 창법도 싫다. 무엇보다 춘천으로 가는 기차라서 싫다.

춘천은 한때 내게도 꿈의 도시였다. 새벽이면 공지천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이외수 작가가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맞으며 걷는 곳, 레코드가게에서는 ‘춘천 가는 기차’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딱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였다.

그녀는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고, 나는 입사한 지 2년쯤 되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월급보다 카드빚이 많았고, 고향에 가기보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 현실 인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어렸지만 모든 게 한 수 위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외양에 사람들을 다루는 고급스러운 매너까지, 친구들도 나보다 그녀를 더 좋아했다.

우리는 주말엔 늘 만났다. 옷은 바뀌었지만 가방은 언제나 프라다였다. 그녀는 프라다가 좋다고 했다. 나중에 돈 벌면 오빠도 프라다 슈트 사줄게 하고 말했다.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금요일 밤이었다. 친오빠 차를 타고 갑자기 고향에 가게 돼서 내일 못 만나겠다고 했다. 그녀의 고향은 춘천이었다. 나는 굳이 집 앞까지 찾아가 시디를 주고 왔다. 가는 길이 심심할까봐 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첫 곡은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였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1989, 춘천 가는 기차, 김현철)

그녀는 그 후로 바쁜 날이 늘어났다. 몇 번을 조른 끝에 광화문 교보문고 옆 커피숍에서 다시 보게 됐다. ‘어땠어? 내가 구워준 시디 괜찮았어?’라고 물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어? 나 친오빠랑 춘천 갔다 온 거 아냐.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그녀가 놀라웠다. 내가 고른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운전대를 잠시 놓은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어쩌면 허밍으로 따라 불렀을 생각을 하니 피가 솟구쳤다. 그 음악은 찔려서 차마 못 듣겠더라, 그걸 양심선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커피숍을 빠져나갔고, 대기해 있던 중형차를 타고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한 번 본 적은 있다. 백화점 입구에서였다. 돈 많아 보이는 중년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가방은 역시 프라다였다. 좀더 크고, 좀더 비싸 보였다. 그녀는 프라다가 잘 어울렸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는 나보다 프라다를 더 사랑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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