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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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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조진국의 모어 댄 워즈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초록색 병맥주를 들고 능숙하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머리칼은 잦은 염색으로 빨강에 가까웠고 ‘나쁜 여자’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저 여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클럽에서 나와 내가 살던 옥탑방으로 갔다. 음악을 틀어놓고 삼각형의 창 앞에 얼굴을 붙이고 앉아 11월의 까맣고 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살한 가수들의 이름과 우리가 죽는다면 울어줄 사람이 몇 명 있을까 하는 얘기를 나누다가 입술도 나누었다. 그땐 그랬다.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살과 살이 닿는 감촉만으로도 처음 만난 사람과 잘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피가 끓었다. 그녀는 ‘좋은 여자’였다. 차가 없는 남자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함께 만화책을 넘기며 지하철을 탔고, 옥탑으로 연결된 위험한 층계를 올라오면서 ‘뒤에서 보는 네 엉덩이가 귀여워’라고 말해주었다. 그녀가 좋은 여자가 되어 갈 때 나는 이미 나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착한 사랑이 부담스러웠고 지루했다.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어. 아직 그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더 나쁜 놈이야.’ 나쁜 놈이라는 자백만 빼고는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내 뺨을 때리는 대신 쓰다듬었다. 손은 따뜻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은 ‘내가 지겨워졌다는 거 다 알아.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회식 후 들른 어느 노래방에서였다. 어깨가 맞닿는 좁은 복도에서 우린 어색한 웃음을 나누었다. 그녀의 머리는 까맣게 바뀌어 있었고, 안부를 묻는 그녀의 입에선 그때 그 쌉쌀한 맥주 냄새가 추억의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다음날 편지함을 열어 보니 메일이 와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며, 넥타이 맨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쓰고 있었다.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어 음악파일을 첨부한다고 했다. 윤상의 노래였다. 언뜻 들으면 경쾌하기까지 한 미드템포의 곡이었다. ‘며칠째 귓가를 떠나지 않는 낯익은 멜로디는 또 누구와 누가 헤어졌다는 그 흔해 빠진 이별 노래. 거짓말처럼 만났다가 결국은 헤어져 버린 얘기. 죽도록 사랑했다고 내가 제일 슬프다고 모두 앞다투어 외치고 있는 결국 똑같은 사랑 노래.’
(2000, 윤상,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 가사가 들리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웠다. 슬퍼할 자격조차 없는 나마저 슬퍼졌다. 아무리 추억이라는 말로 포장하려고 해도, 이별 뒤에 남겨진 것은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일 뿐이다. 하룻밤 몸을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사랑 또한 참 쓸쓸한 일이라는 걸, 눈도 없는 그해 겨울밤 이 노래를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조진국 작가/<고마워요, 소울메이트>,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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