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2.03 19:17
수정 : 2010.02.03 19:17
[매거진 esc] 투쓰리 풀카운트
책상 서랍을 정리하던 와중 너덜너덜한 다이어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옷, 이것은 13년 전의 일기장? 제대 이듬해, 복학하고서 쓰기 시작했던 거다. 반가움에 툭툭 넘기면서 읽자니, 주위에 보는 이도 없는데 얼굴이 모닥불을 끼얹은 것처럼 달아오른다. 이를테면 1997년 5월19일자. ‘형식적 과업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장문이 있기에 대체 뭔 사연일까 해서 봤더니, 그냥 수업 빼먹지 말자는 다짐을 죽죽 늘이고 돌려 쓴 것에 불과했다. 으이그 한심한 놈.
그러고 보니, 내가 전공에 따른 진로를 포기하고 미디어 쪽의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때가 바로 이해였다. 하여 일기를 써도 뭔 습작을 하듯 글 가지고 잔뜩 장난을 쳤던 게다. 읽다 보니 도저히 목불인견이라 새벽에 베란다에서 몰래 태워버릴까도 생각했다가, 쪽팔리는 기록도 하나쯤은 남겨둬야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고이 서랍에 넣어두었다. 좀더 나이 먹고 보면 귀여울지도 모를 일이니. 게다가 젊을 때 이 정도의 개폼이야 정상적인 것 아니겠나. 과장하자면 특권이고. 걷잡을 수 없는 혈기와 열정은, 어떤 일에서도 착실한 기본기보다는 죽이는 필살기만을 향하는 법. 기타를 처음 배울 때도 생초짜 주제에 닥치고 레드 제플린의 솔로부터 땄다. 말하자면 직구보다는 변화구에 매료되는 시기였던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글은 자연스레 간결해졌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는 게을러져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역회전 공과 같은 고난도의 변화구는 팔꿈치 본연의 운동방향과 완전히 반대로 비틀어야만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미사여구를 쏟아내기엔 이미 너무 늙었고(뭐?), 생각만 해도 손발이 먼저 오그라든다. 문체보다는 관점이 우선이라는 신념 혹은 핑계 또한 확고해진 지 오래다. 뭐, 아직까지는 쌩쌩한 판단력 덕에 직구의 힘은 괜찮으니 좀더 버텨도 괜찮지 않을까? 가끔 삼진을 잡아야 할 때만 슬라이더 한두 개씩 섞어 준다면.
조민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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