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20 20:23
수정 : 2010.01.23 10:26
[매거진 esc] 투쓰리 풀카운트
남자들은 가을을 탄다. 그리고 야구팬들도 가을을 탄다. 선선해진 바람은, 정규시즌의 끝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남자이자 야구팬인 나는 지난 시즌, 달력이 9월로 바뀌자마자 일개미로 변신했다. 야구 없이 보내는 스토브리그는 생각만 해도 지옥. 그래서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서 시즌 주요 경기 녹화분을 모았고, 야구 다큐멘터리 영상들을 수집했으며, 숨은 야구영화 타이틀들을 손에 넣었다. 이쯤 모아 놓으면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뜨뜻한 방바닥에 눌어붙어 군고구마 까먹으며, 역전 끝내기 홈런이 짜릿했던 명승부나 물샐틈없는 피칭으로 완봉승을 거둔 경기 등등을 다시 즐길 수 있겠지. 곳간에 양식이 그득하니 시즌 후반기의 우울증도 조금 차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시즌이 끝나고도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해를 넘긴 1월이니, 말하자면 스토브리그의 한복판인 셈. 하지만 나는 그때 모아둔 야구 관련 영상들을 오늘까지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 아마 새 시즌이 시작되는 3월 전까지도 마찬가지일 게다. 심지어 페넌트레이스 기간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들락거리던 인터넷 야구 동호회에도 발을 끊은 지 오래다. 짬이 생기면 책을 읽고, 유럽축구 중계를 보고, 야구와 전혀 관계없는 영화를 본다. 몇 달 야구 못 봤다고 그새 싫증 난 것 아니냐고? 글쎄다. 어쩌다 우연히 클릭해 들어간 야구 관련 뉴스만 읽어도 여전히 탄식이 나오는데. “아! 야구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고.
시즌 종료 직후에 토로했던 것처럼, 겨울철 야구팬들의 심정은 실연당한 이들의 마음 상태와 거의 다르지 않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생각나고 그 푸릇푸릇하던 구장의 잔디가 몸서리나게 그립다. 하지만, 하지만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지난 경기들을 돌려 보며 공허하게 환호하는 모습이, 헤어진 애인 사진을 꺼내 보며 눈물 흘리는 궁상과 무엇이 다르겠나. 어쨌든 잊자.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만큼만 더 이 냉각기간을 참으면, 그 연인은 눈물 나게 화사한 모습으로 3월 말경 다시 돌아올 테니까.
조민준/객원기자
<한겨레 화보>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