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2.16 19:17
수정 : 2009.12.16 19:17
[매거진 esc] 투쓰리 풀카운트
어릴 때는 대체로 4번 타자의 삶을 꿈꾼다. 장래 희망들을 봐도 그렇다. 대통령, 장군, 판검사, 의사. 리더 아니면 도드라지는 직함, 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직업군들이다. 뭐,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든가 사단 작전참모, 변호사 사무장을 일찍부터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진로가 비교적 구체화되는 20대 무렵에도 야심의 대의는 달라지지 않는다.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지. 그러다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모를 삶에 푹 절여지는 30대에 접어들면 세상과 나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기 시작한다. 20대 초반에 글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이런 변화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봐도 이제는 미실이나 덕만, 비담 같은 주연급 캐릭터들보다도 설원이나 알천처럼 한 발짝 뒤에서 극과 사건의 수레바퀴를 밀고 가는 이들에게 더 애정이 간다. 조직으로 치면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들. 이러한 인생관의 변화는 막상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짜 적성을 찾은 결과이기도 하다. 한때는 무작정 ‘나’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글쓰기만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쓴 글이 실리게 될 매체와의 호흡이 더 중요하고, 글을 쓰는 보람도 그 팀플레이를 통해 느낀다.
글쟁이로서의 성공이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상처를 얼마나 잘 팔아먹느냐에 달렸다고 한다. 어느덧 그것은 20홈런·80타점 이상을 기록하는 스타 클린업 문필가들에게나 어울리는 말로, 내 몫은 아니다. 축구로 치면 수비형 미드필더, 야구에서는 2번 타자쯤 되지 않을까. 내 성적에 연연하기보다는 출루한 1번 타자를 어떻게든 진루시키고, 뒤에서 기다리는 클린업 트리오에게 득점 찬스를 연결시켜 줘야 하는 것이 2번 타자의 임무. 무리하게 안타를 치려 하기보다는 꼼꼼히 볼넷을 골라야 할 때도 많고 작전 수행을 위한 희생번트의 요구도 적지 않다. 현실의 자갈밭을 거치며 야심의 사이즈가 쪼그라든 것 아니냐고? 글쎄올시다. 2번 타자라고 홈런 치지 말라는 법은 또 없으니까.
조민준/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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