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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8 19:50 수정 : 2009.07.08 21:53

[매거진 esc] 투쓰리 풀카운트

토요일이면 고향의 어머니와 30분쯤 통화를 한다. 바쁘답시고 자주 내려가 뵙지 못하는 만큼 웬만하면 거르지 않고 챙기는 불효의 면죄부다. 아들에게만 풀어놓는 남편 흉이라든가 시댁 소사 등을 한참 듣던 와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여쭤 보았다. 요즘은 야구 안 보시느냐고. “아이고, 야구는 시간을 하도 많이 잡아 묵어서 인자는 못 보겠더라.”

또래의 사내들에게 어쩌다 야구에 빠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열에 아홉은 아버지 어깨너머로 봤던 텔레비전 중계나 삼촌의 손에 이끌려 갔던 야구장의 첫인상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10~20대 야구광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 야구의 기억은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지께서 늦으시는 날이면 밥상은 티브이 앞으로 차려졌고 채널은 여지없이 고교야구 중계로 맞춰졌다.(아버지께서는 권투 이외의 스포츠 중계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때가 1981년으로, 성준·류중일의 경북고와 김건우·박노준의 선린상고가 봉황대기 결승에서 만나며 고교야구 황금기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해다. 직구와 변화구의 차이며 타율 할푼리의 개념 같은 것도 모두 어머니한테 배웠다. “류중일이 별명이 ‘제2의 김재박’이란다. 그만큼 유격수를 잘 본단다.” 김재박의 플레이일랑 본 적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밥상머리 해설은 늘 흥미를 돋우었다.

지금 내가 목을 매달고 있는 야구, 그리고 그때 내가 보았던 야구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누가 이기고 누가 지건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는 어머니 식의 관전법을 따랐고 또한 즐겼던 까닭이다. 하지만 ‘고교야구’라는 이름만큼이나 풋풋했던 스포츠의 별세계도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이듬해인 1982년, 류중일의 잠실구장 1호 홈런과 함께 고교야구의 황금기는 종언을 고했고 마침내 ‘진짜 김재박’과 함께 프로야구가 도착했다. 그리고 더 이상 어머니와 함께 야구를 보지 않게 된 내 앞에는 환호와 야유와 욕설과 오물이 한데 뒤섞인, 거친 사내들의 관중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민준/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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