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10.14 19:13 수정 : 2009.10.14 19:13

금태섭, 사람을 건너다

[매거진 esc] 금태섭, 사랑을 건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소주를 마시고 귀가하던 길에 생긴 일이다. 동문 여학생 두 명과 함께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욕설을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범생의 행동수칙(?)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애써 못 들은 척 지나치려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등학교 동창 놈들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오, 저놈들이 여학생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려고 하는구나. 시비를 거는 척하다가 도망가서 날 돋보이게 해주려는 모양이구나. 기특한 놈들. 친구들의 우정에 감동한 나는 용기백배하여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속 모르는 여학생들은 그냥 가자고 말렸지만 이런 찬스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진정한 남자의 참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

그러나 이 일을 어쩌랴. 막상 맞닥뜨린 상대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술을 꽤 마신 것 같은 남자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시비를 건 것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일행을 말리면서 나보고도 가라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여학생들이 있는데 남자 체면에 어찌 비겁하게 꼬리를 내릴 수 있겠는가.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할 수 없이 슬금슬금 다가섰다. 그런데 가만 보니 상대방도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술김에 지나가던 사람에게 욕을 하긴 했지만 설마 맞상대를 하러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일행이 말려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도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제발 누군가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리던 남자마저 지쳤는지 맘대로 하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결국, 우리는 팬들의 성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들여다보면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은 펀치를 보니 상대방의 심정이 절로 짐작이 갔다. 내 주먹에도 힘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세게 때렸다가 상대가 진짜 화가 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금세 사람들이 말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못 이기는 척 떨어졌다. 물론 멀어지는 상대를 향해서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이 까분다는 둥, 다음에 만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둥 유치한 야유를 날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나의 용맹성에 전혀 감명을 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묘한 웃음만 남긴 채 말없이 가버렸다. 모처럼의 활극은 망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체면 때문에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소란만 떨다가 비웃음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대부분 실제로 싸우고 싶지 않은데도 그만두는 것이 창피해서 벌어진다. <슬램덩크>의 ‘불꽃 남자’ 정대만은 스스로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고 부르짖었지만, 용기 있게 물러서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분들께 창피를 모르는 남자가 진짜 멋진 남자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금태섭 변호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금태섭, 사람을 건너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