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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30 22:20 수정 : 2010.06.30 22:39

연합뉴스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 극
정부 가이드라인 충실히 따르는 ‘약국 간판’ vs 주인의 취향 한껏 살린 ‘개조심’ 문구

예전에 독일 동포 2세인 친구가 높은 빌딩을 가리키며 “‘임대’가 무슨 뜻이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내겐 온전히 ‘그림’으로 느껴지진 않지만 거리를 걷다 보면 그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글자는 ‘약’이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약국에도 시골의 동네 안방 구실을 하는 약국에도 이 글자가 당당하게 박혀 있다. 동네 곳곳 너무 많기 때문에 한국어 학습을 시작한 외국인이라면 ‘약’ 하나만은 완벽하게 그릴 수 있게 될 거다. 약국 창문에는 붉은 글자로 ‘약’, 수많은 약국 건물의 상단에는 네모난 돌출간판으로 ‘약’이라고 쓰여 있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보면 글자 ‘약’이 퐁당퐁당 돌을 던지듯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 글자의 등장은 반복적이고도 강박적이다. 일본에서는 ‘약’ 자를 한자로 크게 써놓고 프랑스에서는 녹색 십자가 형상을 약국 간판으로 쓴단다.

‘약’ 자 돌출간판은 ‘약’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빨간 글자는 멀리서도 잘 보인다. 고개를 약간 돌려서 보면 ‘유’자와 ‘ㄴ’이 합친 것처럼 보인다. ‘이리로 오라’고 말하는 디자인이다. 보통명사 ‘약’으로 통일한 건 법적인 이유 때문이다. 약국은 병원 간판도 그렇듯이 전문분야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약사법 제47조, 약사법 시행규칙 62조 4항은 약국 명칭 등을 사용할 경우 특정 질병에 관련된 의약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나타내거나 암시하는 약국의 고유명칭 및 표시 광고를 하지 않도록 규정한다. 돌출간판 세금도 돌출간판 속에 형광등을 달았는지, 네온사인을 사용했는지 여부에 따라 다르다. 서울시의 간판은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키워드가 또 ‘통일’이다. 네모난 돌출간판이 다양한 모양새로 바뀌는 건 좋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에 따라 휙 예전 간판을 떼어버린 어떤 건물을 보고 있으면 성형수술 과하게 한 얼굴 같다.

단편애니메이션 〈개조심〉

‘약’ 간판에 뒤질 수 없는 타이포그래피는 ‘개조심’이다.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시골 골목을 걷다 보면 왈왈왈 짓는 소리와 함께 눈에 들어온다. 개 주인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글자체와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만지지 말고 음식을 주지 말라는 등 디테일하게 개조심을 알리는 안내형부터 살벌하게 ‘개’라고 한 글자만 툭 내놓은 건달형도 있다. ‘약’ 간판과 달리 가이드라인은 없다. 통일하려야 할 수 없다. ‘개’라는 한 글자를 대하는 마음, 아니 실제 기르고 있는 강아지를 대하는 마음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판에 검은 매직으로 직직 그어서 문 앞에 세워놓는 것이 ‘개조심’ 간판의 일반적인 스타일이다. ‘개조심’ 글자는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손 글씨의 매력이 있다. 급히 휘갈겨 쓴 ‘개조심’을 보면 그 집에 정말 무서운 개가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런 것도 아니다.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 극

한국은 타이포그래피 천국이다. 어제 아침엔 뻥튀기 용달에서 ‘뻥이요’라는 글자를 봤고 오늘 집 앞에선 ‘주차금지’ 글자를, 종각역 앞에선 글자 주위를 전구로 하트 문양 삼아 두른 ‘꽃’ 간판도 보았다. 거리의 타이포그래피들은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어서 오라고 하기도 하고, 여기 위험하니 다가오지 말라고도 말한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sonvadak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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