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4.21 19:57
수정 : 2010.04.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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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왼쪽), ‘마이마이’ 카세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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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 극
정치인의 사랑을 받는 ‘확성기’ vs 쿨세대의 사랑을 받은 ‘라디오 카세트’
4월의 남춘천행 무궁화호 기차는 엠티 가는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말하기 경연대회’처럼 실내를 울린다. 시장용 목소리로 가득 찬 이 기차 안에서 나는 확성기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사물일까 생각한다. 모두가 확성기를 갖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시끄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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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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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스피커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새마을운동의 광풍이 휩쓸고 간 지금도 확성기는 바쁘다. 동네 좁은 골목을 누비는 상인들의 홍보 수단으로, 시골 마을 회관 꼭대기에선 마을 이장의 지시 사항을 알리는 전달자 구실을 한다. 디자인이 시선을 끌 필요도 없다. 딱 오늘 아침 내 고개를 돌리게 한 1t 과일트럭의 확성기, 그 정도면 충분하다. 곧 선거철이 되면 골목에 확성기를 든 정치인들이 나(서민)에게 인사할 것이다.
확성기의 모습은 나팔(왼쪽)을 닮았다. 소리를 밖으로 울려 크게 만들어주는 나팔은 고대부터 소리로 사람을 지휘하는 힘을 발휘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공동체의 시선을 사로잡는 단순한 논리가 확성기 디자인에 고집스레 숨어있다. 이런 확성기는 오리 주둥이를 떠올리게 한다. 쭉 나온 입의 오리 모양은 다시 사람의 ‘말하는 입’을 흉내 낸다. 안경이 눈을 흉내 내고 보청기가 귀를 흉내 내고 의족이 다리를 흉내 내듯이, 확성기는 할 말 많은 사람의 입을 대변한다. 확성기는 자신의 쓰임새를 제 외형에 고스란히 노출한다. 말을 ‘크게’ 하겠다는 심보다.
이런 측면에서 확성기의 성질은 자기 과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확성기를 사랑한다. 독일의 히틀러는 “확성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독일을 정복할 수 없었다”고 말했고,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 때 원자바오 총리가 사용했던 확성기는 국가 1급 문화재로 선정됐다. 확성기와 지도를 들고 최전선에서 구조상황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확성기가 1970년대 조국의 근대화와 함께했다면, 1980년대 초엔 ‘마이마이’ 카세트(오른쪽)가 거리를 습격했다. 아, 당시 조용필·이용 라이벌 구도처럼 ‘아-하’라는 카세트도 있었다. 확성기가 말하는 입의 기능을 하는 것과 반대로, 카세트는 듣는 귀의 기능을 한다. 일본에서 탄생한 소니 워크맨은 일본 경제 호황의 상징인 동시에 쿨한 세대가 사회와 미끄러지면서 스스로에 몰입하는 방식을 보여줬다. 홀로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소리와의 데이트인가. 국내에서 개발한 ‘마이마이’(삼성)는 이름처럼 ‘내 것’임이 중요했다. 이 카세트는 제품 디자인의 힘이 유행을 넘어선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마이마이’ 카세트는 무뚝뚝한 육면체에 카세트테이프의 사각 얼굴을 그대로 따왔다. ‘오토 리버스’(자동 전환)라는 영어 단어가 큼지막하게 기능을 뽐낸다. 라디오도 확성기처럼 정치적 연금술에 이용되지만 카세트 라디오는 한 명의 귀를 위해 존재하는 개인용 사물이다. 원시적인 디자인의 확성기는 여전히 트럭에 매달려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 첨단 디자인이었던 ‘마이마이’는 추억 속에선 팔팔하지만 멸종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이마이’ 아니, 지금의 엠피3가 사라져도 확성기는 영원할까.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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