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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4.07 22:09 수정 : 2010.04.07 22:09

1982년 디자이너 엔초 마리가 선보인 알루미늄을 활용해 부엌 벽에 요리도구를 매다는 스타일(왼쪽),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만든 와인 따개 ‘안나’(오른쪽). 사진제공 알레시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 극
무기에서 식기로 변신한 ‘자니 앤 자니’ vs 애인을 형상화한 와인 따개 ‘안나’

주방은 가정용 유토피아의 플랫폼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현인들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먹을거리, 잠잘 곳, 입을 거리 순으로 논했듯이 음식은 우리 에너지의 근원이다. 시시해 보이는 사물이지만 까만 프라이팬도, 뭉뚝한 뚝배기도, 나무 손잡이가 도드라진 칼도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꽃무늬가 포인트였던 한국의 밥솥과 비교하면 서구의 유명 주방용품 브랜드들은 규격화된 기능주의를 표방한다. 이탈리아의 브랜드 ‘자니 앤 자니’ 제품은 주방용품치고는 참으로 무뚝뚝하고 건조하다. 메탈릭한 소재에 검은색과 은색을 적용한 군더더기 없는 극소의 디자인을 보여준다. 식재료를 다듬고 볶고 지지고 버무리는 행위의 경건함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제품들이다. 할머니는 한 숟가락만 주면 정 없다고 하셨지만, ‘자니 앤 자니’ 국자로 국물을 뜨는 요리사의 손길은 오차 없이 정확해야지 ‘덤’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니 앤 자니’의 역사는 주방용품 디자인과 남성성의 관계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사냥용품과 총포 등의 총기를 제작해 전쟁 때 다양한 무기를 선보였던 이 회사는 1930년대 무기용 칼이 아닌 ‘식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다가 1960년대부터 식기를 제작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다루는 기술을 바탕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매끈한 금속성의 주방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2년 디자이너 엔초 마리가 알루미늄을 활용해 부엌 벽에 요리도구를 매다는 스타일(왼쪽)을 선보인 이후 일렬로 진열된 날렵한 주방도구 이미지를 과시한다. 20세기를 구축한 산업화와 대량생산의 기술이 가정에 녹아든 최고의 압축 장면이다.

‘자니 앤 자니’가 전쟁 무기와 연관된 국가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면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만든 와인 따개 ‘안나’(오른쪽)에도 역사는 있다. 1994년 홍보용으로 제작된 ‘안나’는 5000개 한정품의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지속적인 상품 생산으로 이어졌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사적이면서도 풍성한 ‘이야기’를 와인 따개에 담아 세상에 내보낸다. 의인화된 이 와인 병따개는 날카로운 금속성 위에 물방울무늬와 체크무늬가 있는 유려한 원피스를 걸치고 있다. 치마 아래를 돌리면 뚜껑을 열어주는 두 팔이 번쩍 이동한다. ‘안나’도 그런 위트와 재미가 좋다는 듯 두 팔을 휙 올렸다가 내린다. 눈 깜박이 인형을 조정하며 놀았던 기억이 날 뿐 내가 지금 술병을 따기 위해 날카로운 도구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와인 따개 ‘안나’는 실제 멘디니의 여자친구 안나 질리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나는 절제되고 모던한 의상보다는 어깨 뽕이 봉긋하게 올라간 스커트를 사랑한다. 멘디니는 한술 더 떠서 ‘안나’에게 남자친구를 선물했다. 자신을 형상화한 ‘알레산드로 엠(M)’은 실제 멘디니의 모습을 닮아, 안나보다 키가 조금 작다. ‘알레산드로 엠’은 부엌에 신선함을 건네는 멋쟁이 신사다. 이야기가 거세된 ‘자니 앤 자니’의 금욕주의와 달리 멘디니의 부엌에선 상상력의 윤기가 흐른다. 와인을 따면서 사랑을 나누는 ‘안나’와 ‘알레산드로 엠’의 몸동작은 노동을 놀이로, 놀이를 연애로 상상케 한다. 이 윤기는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맛있게 해줄까.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 사진제공 알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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