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03.24 19:36 수정 : 2010.03.24 19:36

잭슨 홍, ‘리액티브 헤어 엑스 01’(2006)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칼이 솟던 자리에 ‘닭대가리’ 합체시킨 잭슨 홍의 유연해진 공격과 방어





16세기 에스파냐에서 유행한 피카레스크 소설의 매력은 나쁜 놈을 대놓고 처벌하는 데에 있지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영웅호걸, 중상모략의 대가, 소인배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크게 웃는 만큼 더 많이 땅을 치고 후회한다. 대담하다가도 작은 일에 놀라고 의협심에 불타면서도 탁한 세상에 쉬이 휘청인다. 악당의 마음은 성인군자의 속내보다 쉽게 읽히고, 이들의 육체는 매 순간 세상과 충돌한다. 착한 척하는 디자인이 난무하는 지금, 잭슨 홍의 작업은 피카레스크 소설 속의 악당들처럼 매혹적이다. 몸과 마음에 돋아난 뾰족한 촉수를 알아본다.

자동차 디자이너 출신으로 미술가 겸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잭슨 홍은 호신용 무기로 쓰는 의자나 토하는 의자 등 기존 시각예술의 기능을 배반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중 강력한 놀라움을 주는 건 칼이 솟아나는 헬멧 ‘리액티브 헤어 엑스 01’(Reactive Hair X 01·2006)이다. 작동 원리는 수학 방정식처럼 힘 있고 간결하다. 타인이 일정 간격을 넘어오면 헬멧 뒤에서 칼이 쫙 펴진다. 언뜻 보면 너를 잘 찌를 수 있다는 힘의 과시 같지만 헬멧은 지금 나의 마음이 얼마나 ‘너를 찌르고 싶은지’를 강도 있게 보여준다. 고슴도치의 몸뚱이처럼 호소력 있는 자기방어다.

헬멧의 보호막 기능을 극단적으로 연장하는 이 헬멧의 동작은 메두사의 머리채나 사슴의 뿔처럼 위협적인 동시에 장식적이다. 중세 기사의 안전을 위해 발명된 이래 무늬 없는 금욕적인 디자인을 택했던 헬멧과는 정반대의 방법이다. 호사스러운 칼 장식은 유효하다. 집에 도둑이 침입했을 경우 이 헬멧은 도둑의 정신을 무장해제시키는 최적의 사물일 것이다. 근육처럼 솟아난 칼은 남자들이 품은 기계에 대한 애호와 공상과학영화풍의 근미래를 보여준다.

잭슨 홍, ‘나이브 앤드 옵티미스틱’(2010)
잭슨 홍에게는 다른 의미의 헬멧이 또 있다. 올해 제작한 노란 헬멧은 칼이 솟아 있던 이전 헬멧의 무시무시함을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청계천 소방용품 가게에서 소방용 헬멧을 구입한 뒤 컴퓨터 캐드로 일명 ‘닭대가리’ 조각을 만들어 합체시켰다.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샛노란 색채에 불길이 머리 위로 치솟은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헬멧은 박제된 사슴 머리를 붙여놓은 거치대에 올라가 있다. 안전모의 기능을 드라마틱하게 극대화했던 ‘리액티브 헤어 엑스’와 반대로 불길에 활활 타오른 안전모의 죽음 뒤를 보는 것 같다. 이걸 쓰고 있으면 집에 침입했던 도둑이 웃다가 그냥 나가지 않을까. 노란 헬멧은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허를 찌르는 유효함도 있다.

작가는 노란 헬멧에 ‘나이브 앤드 옵티미스틱’(순진하고 긍정적으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작가의 대답은 예사롭지 않다. “어떻게든 여기서 버티기 위해선 안전을 생각하는 정신 태도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태도를 따르다 보면 약간 바보처럼 되잖아요.(웃음) 예전에 제가 고양이가 털을 삐죽 세우듯 ‘공격적으로 방어적인’ 태도였다면 지금은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하하하 웃는 느낌이 들어요.” 잭슨 홍의 두 가지 헬멧은 공격당하고, 방어하고, 숨었다가, 그래도 웃으며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지고 아름다운 그의 공격과 방어를 보고 싶다면 개인전 ‘엑토플라즈마’(27일까지 서울 청담동 갤러리 2)에 가보자.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