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03 19:22
수정 : 2009.06.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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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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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장진택의 디자인 옆차기
행간으로 읽어본 에쿠스 디자이너 인터뷰의 겉과 속
며칠 전 <중앙일보>에는 ‘에쿠스 디자인, 10만장 중에 건진 단 하나’라는 표제로 신형 에쿠스 디자이너들과 한 인터뷰가 나왔다. 이 중 특히 아쉬움이 남은 부분들을 그대로 옮겨 개인적인 바람을 함께 적는다. “수십 명의 디자이너가 매일 20~30여장씩 그리고 버린 초기 디자인이 10만장은 훨씬 넘을 것이다.”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말로서 상대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숫자 좋아하는 기자들에겐 ‘10만’이라는 압박이 더욱 크게 작용했을 것. 그래서 ‘에쿠스 디자인, 10만장 중에 건진 단 하나’라는 감동적인 제목까지 나왔겠지. 하지만 10만장이나 그리는 건 요즈음 자동차 디자인에서 다소 무식한 일이다. 전략을 똑똑하게 잡아서 효율적으로 디자인을 진행해서 기간을 단축하고 손실을 줄이는 것이 요즘 트렌드이다. 고로 10만장 넘게 그렸다고 해도 자랑스럽게 말할 분위기는 아니다. 아우디의 디자인디렉터 슈테판 질라프는 “몇 장 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장을 그려도 올바른 방향으로 똑똑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올바른 전략과 신중한 스케치를 강조했다. 한마디로 스케치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디자인팀은 출근 시간은 있지만 퇴근 시간은 없다” 디자인 전략을 똑바로 잡아 손실을 줄여 착실하게 디자인했으면 전혀 퇴근 시간이 없을 필요가 없다. 벤츠 본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구민철이 말한다. “야근, 거의 없어요. 가끔 야근해도 밤새는 건 없어요. 회사에서도 야근수당 부담 때문에 그렇게 두질 않아요. 다들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지, (노력파보다는) 천재처럼 일하려고 해요. 일을 별로 안 하는 척하면서 ‘끝내주는’ 스케치를 내놓는 거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집에서 홀로 ‘야근’한 적도 있었어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탈리아의 유명 전문업체와 우리 팀이 똑같은 콘셉트카를 디자인한 뒤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외부 전문가 전원이 현대자동차의 디자인이 낫다고 평가했다.” 현대자동차의 디자인이 세계 최고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인터뷰에서 이 같은 예를 든 걸로 보인다. 언뜻 보면 꽤 설득력 있는 답변이지만, 아쉽게도 이탈리아 유명 전문업체의 현재는 세계 최고가 아니다. 한때 세계 최고이긴 했지만, 지금은 몇몇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남은 회사들도 그리 우량한 상태는 아니다. 게다가 ‘이름을 밝힐 수 없는’이라는 문구에선 괜한 의심까지 생긴다. 아예 말을 말지.
“헤드램프는 독수리 눈을, 라디에이터 그릴은 독수리 날개를, 리어 램프의 발광다이오드(LED) 디자인은 독수리 부리를 형상화했다.” 디자이너는 앞뒤 램프와 그릴이 독수리를 닮았다고 말했지만, 이 말을 들은 대중들은 에쿠스에 독수리 이미지를 씌울 수 있다. 중후한 이미지를 위해 용맹스런 독수리를 말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디자이너가 어떤 동물을 보고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는 보통 마케팅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다. 스포츠카의 디자인이 퓨마를 형상화했다고 할 때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에쿠스와 독수리는 갈 방향이 달라 보인다. 아스팔트에 정중하게 붙어 미끄러지는 에쿠스에 날렵하게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는 설득력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장진택 〈GQ〉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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