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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22 14:58 수정 : 2009.12.07 10:19

1961년 11월에 있었던 독립운동자동인회 발기 총회 기념식. 맨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째가 참의부 참의장을 역임한 김승학이고, 그 오른쪽 옆이 이강, 그 옆이 김창숙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일곱째가 유우석,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오광선이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⑪ 무장독립투쟁 연구 빈약한 이유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역사학도들에게 현대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가 만들었다는 이 금기는 표면상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명분이었다.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 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 교과서의 공식이 단군 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현대사, 객관적 연구 난망” 내세우지만
총독부 주택난 해결 정책은 세밀 묘사
1920년대 참의부 등 일제와 숱한 교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엔 이름만 삐죽

한 나라가 숱한 고초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면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 현대사 연구붐이 일어나 이 금기가 무력화되기까지 독립운동사는 소수만의 영역이었다. 그사이 생생한 증언을 남겨줄 살아 있는 전사들은 대부분 고통과 가난 속에서 저세상으로 가야 했다.

정의부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정이형은 19년의 옥살이 끝에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으로 친일파 처리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으나 1956년 불우하게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지금껏 국사 교과서는 무장투쟁보다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해왔다. 무장투쟁사는 마지못해 이름 정도 적어주는 선이었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조직이었던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에 대해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정부가 직할하였다”(121쪽)라고 서술한 것이 전부다. 학생들은 삼부가 무슨 활동을 했는지도 모른 채 이름 외우기에 바쁠 뿐이다. 반면 같은 국사 교과서는 일제 때 큰 발전을 이룬 것처럼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인구는 늘어 갔다. 인구 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 거주 한국인은 1700만명 정도였다. 1930년에는 2000만명, 1942년에는 2600만명으로 늘어 갔다. 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명 정도였고, 1940년에는 93만명 정도로 4배가량 늘었다.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242쪽)

조선총독부의 식민 정책 덕분에 갈수록 인구가 증가했고 서울이 근대도시로 탈바꿈했다는 기술이다. 국사 교과서는 세부적인 생활사까지 기술한다.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은 사랑방과 문간방이 없어지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니스와 페인트를 칠한 혼합형 가옥이었다. 1930년대 나타난 문화 주택은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생겨났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들어 도시민, 특히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지은 일종의 국민 연립주택이었다.”(243쪽)

인적 청산 안돼 친일파 주장 버젓이


1920년대 개량 한옥이 나타나고 30년대에는 문화 주택이 생겼으며 40년대에는 총독부에서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 연립주택도 지어주었다는 기술이다. 식민지 백성들은 응접실과 침실이 따로 있고 아이들도 독립된 방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렸다는 기술이다. ‘일제시대가 좋았다’는 친일파들의 주장이 교과서에 버젓이 되살아난 것이다. ‘니스와 페인트’라는 도료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었으니 지면이 부족해 삼부의 활동 내용을 적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삼부는 생략되어도 좋은 조직이 아니다. 임시정부 산하였던 참의부는 1924년 결성 당시 5개 중대에 600여명의 무장병력이 있던 행정·군사조직이었다. 참의부의 전신인 통의부 의용군은 전성기에 2000~3000명이었다. 훗날 참의부 참의장이 되는 김승학은 약식 자서전 <망명객행적록>에서 1920년 8월 상하이(상해)에서 240여정의 무기와 탄환 수만 발을 천신만고 끝에 구입해 광복군에게 나누어주자 불과 3~4개월 만에 일제 기관에서 발표한 것만으로도 교전 78회, 주재소 습격 56회, 면사무소 및 영림서 소각 20곳, 일제 군경 사살 95명의 혁혁한 전과를 올려 압록강 연안과 평안남북도 지역이 일시 전쟁터로 변했다고 전하고 있다. 참의부는 1924년 압록강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의 배에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부어 혼비백산 도주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때 사이토 마코토 저격에 나섰던 참의부 1중대 1소대장 이의준(별명 한권웅)은 2년 후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1925년 3월에는 참의부를 급습한 일제 군경과 집안현 고마령에서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다 참의장 최석순 이하 29명이 전사하는 고마령 참변을 겪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일제 때 크게 발전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정의부도 마찬가지로 1925년 9월께 5개 중대 1개 헌병대 총 410명의 의용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많은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서 여러 차례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정이형은 1927년에 체포되어 1945년까지 19년간 투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사 교과서는 삼부의 무장투쟁은 함구한 채 1940년 임정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광복군이 본격 전투에 나서기 전 일제가 패망했으므로 학생들은 1920년의 청산리·봉오동 전투 외에는 별다른 무장투쟁 없이 연합국 승전의 부수물로 해방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가 되다 보니까 정의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인 <정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1998년이고, <참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2005년이다. <참의부연구>는 그나마 참의장 김승학의 증손자가 만학으로 역사학에 투신해 거둔 성과이고 신민부는 아직도 박사학위 논문 하나 없는 형편이다.

중, 식민사학 ‘동북공정’ 도구로 이용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해방 후 친일잔재 청산에 실패한 데서 기인한다. 1948년 수립된 새 정부는 독립유공자 표창과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 그리고 일제가 만든 식민지배 이론에 대한 종합적 검토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참의부 참의장 김승학이 1964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의 서문에서 “건국 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독립유공자 표창과 친일파 청산)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 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를 범”했다면서 “(이것이) 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 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라고 토로한 것처럼 친일파는 다시 중용되었다. 김승학은 “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 10년 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고 평가했다. 친일 세력이 해방 후에도 사회 주도세력이 되면서 역사학계도 조선 후기 노론과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주도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간 한국 주류사학계는 정체성론이니 타율성론이니 하는 총론으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했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보고서에서 보듯이 식민사학은 현재도 정설일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을 보이고 있다. 1949년 4월 27일 건국공로훈장령이 대통령령 제82호로 제정 공포되고 그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만 서훈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혼자 받으면 비난이 일 것 같으니까 이시영 부통령을 끼워 넣은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1960년의 4·19 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독립유공자도 표창하지 않아 생존자는 물론 안중근·김좌진·이봉창·윤봉길 등 순국자 그 누구도 독립유공자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정통성 보완을 위해 1962년부터 독립유공자를 표창했는데 공적조사위원회에는 조선사편수회 출신들도 위원으로 들어가 있었다. 1963년부터는 김승학·김학규·김홍일·오광선 등 독립운동가들도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조선사편수회 출신 위원들에게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뭐 암마?”라고 묻자 얼굴만 붉힐 뿐 아무 대답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한때 통쾌한 에피소드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면서 독립운동사는 말살되고 고대사는 일제 식민사관이 정설이 되었으며 노론이 애국적인 정당이었던 것처럼 서술되었다. 한국 사회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된 근본 원인도 여기에 있다. 한국사 서술을 바로잡는 문제는 비단 한국 사회 내부만의 문제도 아니다. 현재 동북공정의 주요 이론은 대부분 일제 식민사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큰 고통을 겪었던 중국이 일제 식민사학을 패권주의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한·중·일 3국이 상호 호혜적인 평화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것이 진정한 동북아 평화체제 수립의 길이다. 시대착오적인 노론사관과 침략적인 일제 식민사관의 극복은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끝>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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