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율곡 이이를 모신 서원으로 제자 김장생도 배향되어 있다. 김장생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창작해 사실인 것처럼 전파했다(왼쪽). 유수원이 쓴 사회 개혁서인 . 유수원은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임에도 국사 교과서는 노론이란 식으로 서술해왔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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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조선사편수회 거쳐 사학계 주류로
‘상공업 중심 개혁론=노론’ 왜곡 등
조작된 국사교과서 바로잡을 필요 서인은 국왕 축출의 명분이 필요하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진정한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쿠데타가 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논리였다. 서인들은 인조반정 때 체제 내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남인들에게 뜻밖에도 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도륙했다. 죄 없는 남인들을 역모로 꾀어 죽인 정치공작에 반발한 서인 소장파가 소론이 되고, 당을 위한 행위라고 옹호한 서인 노장파가 노론이 된다. 노론은 경종 때 소론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던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 멸망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 노론 일부 세력은 외세에 맞서 성리학 사회를 수호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에 가담했지만 다른 일부는 일제에 협력해 망국에 가담했다. 이런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이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에도 한국 사학계 주류가 됨으로써 국민들은 여러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다.
탑골(파고다)공원 전경. 조선 후기 이 일대에는 백탑파라 불렸던 박지원, 이덕무 등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현실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은 집권 노론과는 다른 세계관 속에서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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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뿌리 이이 ‘십만양병설’은 허구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현재 국민적 상식 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현재도 일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대관>에서 “양병십만론의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金長生) 소찬(所撰)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설령 그의 만년의 일이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연월이 미상한데’ 어떻게 ‘임란 전 10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의 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임란 10년 전인 선조 16년 4월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이이는 선조 16년 2월 “양민(養民)을 하지 않고서 양병(養兵)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창할 수는 없었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김장생은 또 ‘정철 행록’에서 정여립의 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委官: 수사책임자)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정철이 유성룡에게 왜 노모와 아이까지 죽였느냐’고 따졌다고까지 적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형벌을 받은 날짜는 선조 23년(1590) 5월 13일인데, 유성룡은 그해 4월부터 휴가를 얻어 안동에 내려갔다가 5월 20일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를 군위에 장사지내고, 5월 29일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6월에 서울로 올라와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을 때 유성룡은 서울에 있지도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은 인물은 유성룡이 아니라 정철이었다.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은 정여립의 옥사 자체를 서인 정철 등이 동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실제 그랬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주제지만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아 수많은 동인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김장생은 정여립 사건으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죽은 데 대한 비난 여론을 유성룡에게 전가하기 위해 사실을 날조했던 것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103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필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년) 등의 저서는 차치하고라도 송시열이 효종의 정적이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너무나 많다. 효종 8년(1657) 올린 <봉사>(封事)에서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라고 효종의 치세를 전면 부인한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송준길은 사사건건 효종의 발목을 잡았던 효종의 정적이었음에도 국사 교과서는 효종의 충신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이 현종 말~숙종 초의 2차 예송논쟁으로 실각하자 사방에서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란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횡행하자 예송논쟁 때 그와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의 사형을 반대했다. 그러나 허목은 이 차자에서 송시열을 중종 때 사형당한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비교하면서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며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뒤늦게 형량을 가중해 사형시키는 것은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효종의 ‘정적’ 송시열 충신 탈바꿈 국사 교과서는 또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주창자들에 대해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며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고 서술했다. 이 기술에 따르면 유수원은 노론 출신이 되지만 유수원은 노론은커녕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노론에 의해 능지처참 당하고 온 집안이 도륙 난 인물을 노론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이 국사 교과서 서술 구조이다. 남인들이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주창한 데 맞서 ‘상공업 중심 개혁론’은 노론이 주창한 것으로 둔갑시키려 한 노론 후예 학자들의 조작이었다. 청나라를 배우자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노론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었다. 그 주창자인 홍대용·박지원은 현실에서 소외되었던 양반 사대부였고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은 모두 서자들이었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노론’이란 서술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는지 2007년도 국사 교과서부터는 ‘노론’이란 말을 삭제했다. 그러면서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주창했다는 사실도 빼버렸다.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부근의 경기 지방에서 활약한 남인 출신이었다”(2003년)는 내용을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2007)라는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노론이 주도했다는 거짓 서술이 문제가 되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제기했다는 ‘맞는 사실’까지 빼버린 것이다. 남인들만 실학을 주창한 것으로 써줄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런 식으로 교과서를 서술하니 국사 교과서가 흐름을 알 수 없는 누더기 조각이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다양성의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미래의 주역들이 언제까지 사대주의와 폐쇄적 획일주의 속에서 과거 퇴행을 지향했던 노론의 가치관을 학습해야 하겠는가? 언제까지 국사 교과서의 일부가 일제 식민사학과 노론 당론 교재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방치해야 하겠는가? 국사 교과서 서술 체제에 대한 전사회적인 논의의 틀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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