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시대 유주(왼쪽 점선 안)와 대방군(오른쪽 점선 안) 지도. ‘중국 역사지도집 제3집(삼국, 서진시대)’에 실린 것으로, 위나라가 평안남북도는 물론 황해도의 대방군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촉, 오와 싸우기에도 전력이 부족하던 위나라가 고구려 남부에 대방군을 운영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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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④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
* 둔유 : 屯有, 동어 : 冬於, 열구 : 列口, 율구 : 栗口
한사군 중에는 진번·임둔군처럼 설치 25년(서기전 82) 만에 낙랑·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사학계는 황해도와 한강 이북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과거에는 한사군 진번군의 고지(故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남 일대라고 규정한 주류 사학계로서는 대방군은 황해도쯤에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고대 사서가 말해줄 것이다.
삼국지 “대방군, 둔유에 설치” 기록한자음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병도 “둔유는 황해도 동어라 믿어”
군국지에선 “대방군, 요동에 속해”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중국계 무덤이나 유물은 덮어놓고 한사군 유물로 보는 주류 사학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보겠지만 우선 장무이의 무덤에서 나온 ‘무신’(戊申)년이 새겨진 명문 벽돌만 제대로 해석해도 봉산군은 대방현이 될 수 없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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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장황한 설명 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둔유(屯有)는 ‘군대가 진 치고 있다’는 뜻으로서 주요 군사기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게다가 ‘우동어홀’ 중에서 우(于)자와 홀(忽)자는 마음대로 빼 버리고 가운데 동어(冬於)만을 취해서 ‘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무덤군과 장무이 무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이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이 나왔다고 대방군 지역으로 확정한 것이지만 낙랑군이 망한 지 35년 후에도 이 지역은 한사군이 지배했다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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