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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며 과거청산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의지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2009년 말 사법부가 <역사속의 사법부>를 펴내면서 산산이 깨어졌다.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1995년의 <법원사>에 비해서도 크게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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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유산 청산”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기대와 달리 극소수 희생자 재심 결정만
일부 판사 ‘선배의 부당한 판결’ 대신 사과
“법관 개개인이 지키지 않으면 독립 없어”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55. 사법부의 과거청산 이용훈 대법원장의 취임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행기의 정의를 세우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중 사법부의 과거청산 문제는 가장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였다.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도, 수많은 조작간첩 사건도 모두 사법부의 판결을 거쳤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과거청산에 대한 안팎의 요구를 비켜갈 수 없었다.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며, “대법원장인 저를 포함한 사법부 구성원 모두는 국민 여러분께 끼쳐드린 심려와 상처에 대하여 가슴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그는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며 과거청산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이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사 문제는 △재심 확대를 통한 청산 △부당한 재판에 관여한 법관 청산 △위원회 구성을 통한 방식 등 3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모두가 판사 개개인의 재판의 독립을 해칠 우려와 관련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며 “우선 기존 행정조직을 통해 문제가 되는 시기 판결의 흐름을 검토한 뒤 후속 조처를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관련해 “국가정보원과 경찰청의 자체 과거사 조사가 매듭지어지면 그 결과도 분석해 참조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적인 사법부에서 대법원장이 이 정도의 의지를 밝힌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용훈은 1993년 서울서부지원장으로 있을 때 같은 법원 김종훈 판사의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라는 글이 제3차 사법파동의 도화선이 되자, 서부지원의 전체 법관회의를 열어 소장 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법원장이 주재하는 법원장회의에 보고하여 소장 판사와 법원 상층부의 가교 구실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역할 때문에 과거청산에 대한 그의 견해 표명은 일정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사법 엘리트의 한 사람인 그가 제대로 과거청산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 또한 높았다. 실종된 사법부의 자체 과거청산 취임 1년이 지나 2006년 국정감사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 시국사건 6000여건을 수집해 법원행정처 판사들에게 검토 작업을 지시했고, 이미 대략적인 당시 판결 등의 흐름을 파악한 상태이며 기회가 닿는 대로 법원 역사를 재정립할 기회로 삼겠다. 시국 관련 재심사건이 대법원에 상고되면 판결문에 법원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내용을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2008년 9월 말,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죄했다. 그는 “권위주의 시대의 각종 시국관련 판결문을 분석했고 조만간 발간될 사법부 역사자료에 포함해 국민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사법부의 과거청산 작업이 가시화하지는 않았다. 남미에서 군사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법관들을 사법처리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사과에만 그친 한국의 현실은 매우 답답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앞장서 “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피해를 본다”, “사법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펴면서, 행정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을 무력화시키고, 근현대사 교과서의 개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대법원장이 이 정도 사과한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일말의 기대는 2009년 말 사법부가 <역사속의 사법부>를 펴내면서 산산이 깨어졌다. 예컨대 송씨 일가 간첩사건의 경우,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오가며 도합 7차례의 판결 결과 피고인들이 유죄로 확정되는 과정만을 기술했을 뿐, 안기부가 이 판결에 어떻게 작용했고 법원이 어떻게 안기부에 협력했는지는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결과 상세히 밝혀졌는데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1995년의 <법원사>에 비해서도 크게 후퇴했다는 평이다. 재심만이 과거청산의 수단인가? 이용훈 체제의 사법부는 재심만을 사법부 과거청산의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한 듯싶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20년, 30년 전 온 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바짓가랑이를 들어 올려 보면 고문 상처가 남아 있다고 울부짖었지만, 끝내 법정에서 외면당했다. 그런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린 그 사법부에 다시 자기 사건을 들고 가야 하는 것이 과거청산의 유일한 방법일까? 더구나 현행법의 재심 개시 기준은 너무나 엄격하고도 까다롭다. 현행 재심기준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판, 다시 말해 법관이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판단했음에도 숙명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판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공안사건과 시국사건 판결은 불행하게도 법과 양심만이 아니라 안기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대법원은 어떤 기준을 택했는지 모르지만 문제판결 240여건의 판결문을 분석했다고 한다. 긴급조치 사건만 해도 1500여건인데 문제판결이 240여건에 그치는 것일까? 지금 재심이 이루어지는 사건은 각종 과거사위원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사하여 재심을 권고한 사건들이다. 약 40여건의 사건에 대해 재심이 권고되어 그중 20여건의 재심이 개시되었다. 과거의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이라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판결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원이 인권의 최후 보루이기를 포기하면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추대하고, 누구나 다 아는 공지의 사실을 국가기밀로 만드는 나쁜 판례가 나온 뒤 억울한 조작간첩이 속출했다. 중정-안기부가 적발한 400여건의 간첩사건 중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작의혹 간첩사건 분야 소위원회는 시간과 인력의 부족으로 겨우 16건만을 조사대상으로 선정하여 사건기록을 복사했다. 그 산더미 같은 기록에서 소위원회는 그나마 4건만을 조사했을 뿐이다. 나름 죽어라 하고 조사했지만, 기록을 복사해 놓고도 검토조차 하지 못한, 아니 기록조차 찾아볼 엄두도 못 낸 수많은 사건의 피해자들은 도대체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해야 할까? 후배법관의 사과만으로 되나? 지금까지 판결이 이루어진 15건가량의 사건은 모두 무죄가 나왔고, 그중 재판장이 판결문에서 과거 잘못된 판결을 내린 선배 법관을 대신하여 사과한 것은 9건이라고 한다. 한 예로 오송회 사건의 경우 2008년 11월 광주고법 이한주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이 (…) 받았던 기나긴 세월의 쓰라린 고통과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에 걸었던 기대감의 상실, 그리고 수십 성상 동안 가슴속 깊이 새겨 왔을 사법부에 대한 거대한 원망을 재판부는 머릿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 원심 및 재심대상 항소심은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폭행·협박·고문을 당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변호인들의 증거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대한 특별한 증거조사도 하지 않은 채 피고인들의 수사기관에서의 허위 자백을 기초로 피고인들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 피고인들이 무고하게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했고, 그로 인해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이 감내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받았던 점에 대하여 재판부는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2009년 5월 서울고법 이성호 부장판사는 아람회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법관은 “비록 극심한 불이익을 받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야” 한다며 “교사, 경찰·검찰 공무원, 새마을금고 직원, 주부 등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 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구금을 법정에서 절규했는데도 당시 법관들은 이를 외면하고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선배 법관을 대신해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시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고인이 된 이재씨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며 나머지 피고인들도 평화와 행복을 찾기 바란다”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판결 직후 이성호 부장판사는 자신을 ‘진보판사’라고 분류한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나는 서울 강남에 살면서 종합부동산세도 내고 평소 성향도 보수 쪽에 가깝다”며 “하지만 사실에 대한 판단은 정권이나 이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양심 위에 드리운 바짓가랑이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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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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