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장 시절의 가재환 판사. 법원 안팎에서는 가재환 판사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으나 문민정부 들어 제3차 사법파동을 겪으며 정치판사라는 이유로 대법관에 임용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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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54회 - 제3차 사법파동과 ‘정치판사’ 논란
문민정부의 출범과 사법개혁의 과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사법부의 개혁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해 4월 29일 서부지원 김종훈 판사가 법원 상층부에 개혁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의견서에서 “우리 법관들 중 누가 감히 국민들에게 비친 우리의 모습이 헌법정신에 투철하였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안기부(중정), 검찰, 심지어는 기무사(보안사) 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재판권을 행사하였는가. 인사권을 통한 간접통제는 없었는가. 왜 법관이 국보위나 대통령비서실에 파견 나가 있었는가”라고 자문했다. 이 글에 이어, 광주지법 방희선 판사, 대구지법 신평 판사 등의 언론기고문이 나오고, 마침내 6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난날 사법부의 비겁함을 꾸짖는 역사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속죄한다. 과거사 반성과 청산 없이는 사법부 개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없다”고 고백했다. 이 글은 법관은 오직 판결로만 말한다는 말을 빗대어 “판사들은 판결로써 말해야 했을 때, 침묵하기도 하였고, 판결로써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기도 하였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 돌리기도 하였다”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제3차 사법파동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 문건은 애초 민사지법 단독판사 40명이 모여 작성했으나, 대법원에 제출하는 문제를 놓고 표결하여 28명만이 서명했다고 한다. 법관들의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문건의 표현은 초안보다 많이 온건해졌고, 정치판사의 퇴진요구는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용은 5년 전의 2차 사법파동 때에 비해 상당히 격렬하였고,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왔다. 진보적인 민변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변협도 사법부 수뇌부와 정치판사의 퇴진을 요구했다.
정치판사 퇴진 논란과 가재환의 대법관 임명 좌절
법원행정처장인 대법관 안우만은 7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판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며 “여론 재판 식으로 특정 법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5공시절 서울형사지법의 수석부장판사와 원장을 지내고 대법관으로 승진해 정치판사에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형사지법원장 시절 2차 사법파동 당시 소장 판사들이 동조 서명할 움직임을 보이자, 소속 법관 전원을 불러 “구속영장 한번 처리해 보지 않은 법관들은 우리들의 고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하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시체에 칼을 꽂는 행동을 자제해 달라”며 눈물로 설득해 서명을 막은 일로도 유명하다.
“문민정부 출범…다시 빗발친 사법개혁 요구‘정치판사’ 안우만·‘재산축적’ 김덕주 원장 퇴진
‘안기부 창구’ 가재환, 대법관·헌재 재판관 탈락” 안우만 법원행정처장의 사임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싶었던 제3차 사법파동은 공직자 재산등록이 시작되면서 김덕주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의 재산축적과 관련하여 물러나게 되며 재연되었다. 신임 대법원장으로는 재산등록에서 꼴지를 한 윤관 대법관이 선임되었다. 윤관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그보다 고시 기수가 앞선 대법관 2명이 사임함에 따라 모두 3석의 대법관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때 사법부 내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재판능력은 물론 행정능력도 겸비하여 “일찌감치 대법관 재목으로 지목”되어 온 서울민사지법원장 가재환이었다. 그는 대법관 0순위라는 법원행정처 차장도 지냈고, 고시 15회 중 확실한 선두주자였지만, 대법관 선임에서 탈락했다. 언론은 그의 탈락이 “법원 내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의 가재환 밀어주기 유태흥 대법원장의 비서실장을 5년간 지낸 가재환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등 많은 공안사건에서 안기부의 압력을 사법부에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그는 일단 대법관 선임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1994년 7월에는 대법관 6명의 임기가 만료되고, 9월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5명이 임기만료로 물러나게 되어 있어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안기부는 대법관 인사를 앞두고 5월 12일 <가재환 민사지법원장, 당부 업무 중요성 강조>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따르면 “1. 가재환 민사지법원장(54세, 고시15회, 충남)은 최근 조계종 사태 수습 혼선 (…) 등과 관련해, 예전에 안기부가 국가의 정책 및 조정에 적극적이었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 않았다며 당부의 기능약화를 아쉬워하고 있음. 2. 이와 관련, 가 원장은 (…) 국민들이 정보기관을 백안시하는 풍조에 의해 안기부의 기능이 너무 축소되는 것 같다고 우려하면서 자신의 오랜 공직 경험과 시각으로 볼 때 국민들의 감상적인 권력기관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무질서는 오히려 더욱 큰 사회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당부 업무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한다. 이 보고서는 가재환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도 빠져 있다. 안기부 실무자들이 이 보고서를 올린 진짜 이유는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3. 한편, 가 원장은 민사지법원장으로 국가관이 확고하고 특히, 당부 업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어 금번 대법관 인선에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으나 소장 법관들이 대법원장 비서실장 경력 등 과거 경력을 내세워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어 내심 초조해 하고 있다 함.” 안기부는 수사권이 폐지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놓고 안기부장이나 수사관에 대한 고소고발이 빈발하는 상황에서 가재환 같이 안기부에 우호적인 인사가 대법관이 되는 것을 확실히 바라고 있었다. 가재환의 두 번째 고배 대법관 선임이 임박한 7월 2일 안기부는 <법원, 대법관 인사에 소장파 영향력 우려>라는 또 다른 내부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1. 법원에서는 최근 대법관 인사와 관련해, 소장법관들이 과거 정부시책에 적극 협조한 법원간부들을 탈락시키기 위한 음해여론을 유포시키고 있어 우려하고 있는 바, 2. 소장법관들과 민변 소속 변호사들은 안우만, 윤영철 대법관 연임 여부 및 고시 15회인 가재환 민사원장, 이용훈 행정처차장, 사시 1회인 이임수 전주지법원장, 서성 춘천지법원장 등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안우만 대법관은 경남고 출신으로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 원장, 법원행정처장 등 요직을 거친 실력자임에도 정치판사로 매도하고 있고, 고시 15회의 가재환 서울민사원장은 유태흥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 등 재직시 정부시책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투서를 하고 있고(…) 3. 이에 대해, 법원 간부들은 소장법관들이 음해하고 있는 안우만, 가재환, 이임수 등은 확고한 국가관과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반면에, 경쟁자로 거론되는 윤영철, 이용훈, 서성 등 3명은 모두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만 치중해온 이기적인 성품인데도 소장파들이 음해하고 있어 능력있는 법관들이 희생되고 보신주의적 인사들만 중용될 우려가 있다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함”이라고 적고 있다. 안우만과 윤영철은 모두 대법관 연임에서 탈락했는데,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인 안우만은 2기 헌법재판소 소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정치판사 안우만의 헌법재판소장 내정이 보도되자 민변은 반대서명운동에 돌입했고, 변협은 매우 격렬한 어조의 반대 결의문을 채택했다. 여론의 거센 반대 때문에 윤영철이 헌법재판소장이 되어 2004년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불가라는 역사적 결정의 주역이 되었다. 가재환은 현 대법원장인 이용훈과 경합을 벌였는데, 당시 언론에 보도된 하마평을 보면 이용훈은 “법조계 안에서 이른바 ‘물 먹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과거 형사사건을 거의 맡지 못하고 보직 등에서 불이익을 보았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이런 과거가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했다. 이용훈은 사법행정의 달인이라 불리던 가재환이 법원행정처 차장에 임명된 지 6개월이 안되어 정치판사라는 비판을 받고 물러나자 그 후임이 되었고, 7월 인선에서 가재환을 제치고 대법관에 선임되었다. 가재환은 9월에 다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물망에 올랐으나 이 역시 좌절되었다. 사법연수원장으로 가게 된 가재환은 이 해 11월 15일자 안기부 보고서에 다시 등장한다. <가재환 사법연수원장 관련 동향>이라는 보고서는 “타고난 기획력과 행정력으로 사법연수제도의 합리적 개선에 일조해 오던” 가재환이 법무사교육원의 요청으로 휴가도 취소하고 법무사들에 대한 강연에 나서, <법무사 윤리>라는 제목으로 “각조 540명씩 5개조로 나누어 1시간 30분씩 실시”하였다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가재환이 “시종 유쾌한 언변과 유머”로 “명강의”를 하였고, 수강생들도 “알찬 내용과 성실한 자세”에 호평을 보냈다고 쓰고 있다. 아무런 정보가치가 없는 이 보고서가 올라간 이유는 아마도 당시 청와대가 개각을 앞두고 법무장관 후보를 법원 출신에서 찾고 있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재환은 법무장관 인선에서도 부산-경남 인맥이 민 안우만에게 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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