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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04 20:53 수정 : 2010.06.04 20:53

1988년 7월 ‘통과’로 예정된 이일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의원들이 밝은 표정으로 투표하고 있다.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70년대와 80년대의 사법부에서 이일규는 대법원 판사로 있으면서 송씨 일가 간첩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고, 또 수많은 소수의견을 냄으로서 사법부 안팎의 신망을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88년 평판사 대부분 ‘새 대법원 구성’ 서명
‘5공’ 협력 대법원장 퇴진·임명 부결 이끌어

이일규 원장 체제 출범…재판 외압 차단
인적·과거 청산까진 못 나가 ‘절반의 성공’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53.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제2차 사법파동

소장 판사들의 사법부 개혁 요구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민주진영의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분열됨에 따라 간신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8년 4월26일의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125석으로 제1당을 차지했지만, 김대중의 평민당이 70석, 김영삼의 민주당이 59석, 김종필의 공화당이 35석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했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정부와 국회의 개편이 마무리되자 사법부의 새로운 구성이 중대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재야는 “만약 새 국회개원과 더불어 새로 구성될 사법부에서 이렇다 할 수뇌부의 개편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 정부가 ‘제6공화국’이 아니라 ‘5.5공화국’ 정부임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조영래)이라고 주장하는 등 사법부의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동향인 경북 출신의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을 원하고 있었다. 본란 43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용철이 대법원장이 된 뒤에는 전임자 유태흥 시절에 비해 나름 의미 있는 판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용철은 역시 전두환이 임명한 5공화국의 대법원장이었다. 노태우가 김용철을 유임시키려 하고, 김용철도 임명동의안의 국회통과를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한다는 소문이 돌자 소장 판사들이 행동에 나섰다.

1988년 6월15일, 서울민사지법의 단독판사들을 중심으로 법관들의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는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 보루가 되지 못하고, 국민들은 기본권을 “국민들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써 스스로 쟁취”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성명서는 “민주화열기의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아무런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를 불신하고 심지어는 매도”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소장법관들은 사법부가 새로운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길은 “사법부의 수장 등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함에 있다”고 주장했다.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

법조계에서는 이 성명서 발표를 ‘쿠데타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처음 성명서에 서명한 민사지법 판사는 37명이었지만, 서명자 수는 금방 430여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법관 수가 1000명이 안 됐고, 부장판사급 이상은 서명에 참가하지 않은 사실을 고려한다면, 평판사 직급의 법관들은 거의 대부분 서명한 것이다. 서명은 전국의 거의 모든 법원에서 이루어졌지만, 딱 한 군데 예외가 있었다. 5공 시절 시국사건의 대부분을 처리했던 서울형사지법의 판사들은 단 한 명도 서명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 언론은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은 ‘스크린’을 거쳐 임명되고, 법원의 분위기에 따라 서서히 ‘새끼정치판사’로 단련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위법관들은 소장 판사들의 집단행동에 격앙했지만, 정작 김용철 대법원장은 서명이 확산되자 “모든 책임은 수장인 나에게 있다”며 “법관들의 서명사태는 사법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사법부 발전의 계기가 돼야 한다”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사퇴했다. 그는 퇴임식을 마치고 ‘사법부의 앞날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며 젊은 법관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는 법원을 떠났다.

김용철의 퇴임으로 후임 대법원장이 누가 되느냐는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이헌환 교수는 “바야흐로 대법원 수뇌부와, 소장법관 및 민간사회 사이의 사법부 개혁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며 이는 “1945년 해방 이후 40여년 만에 빠른 속도로 성장해온 민간사회가 그동안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한 사법부를 상대로 한 힘찬 투쟁”이라고 평가했다. 소장 법관들은 성명서에서 “국민의 민주화 의지를 무시한 채 여러 정당간의 산술적 정치거래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못 박았지만, 노태우 정권은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의 국회통과를 위한 표 계산에 분주했다.

정기승 임명동의안의 부결

노태우 정권은 국회의 의석 분포상 공화당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충청도 출신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노태우는 공화당 총재 김종필의 고등학교 후배인 대법원판사 정기승을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했다. 노태우는 나름 표 계산을 한 것이지만, 정기승의 지명은 법조계 안팎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서울형사지법원장에서 대법원 판사로 승진한 정기승은 군사정권에 협력하여 영달한 대표적인 인사로 꼽혔기 때문이었다. 노태우가 정기승을 대법원장에 임명하려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대한변협은 당일 긴급이사회를 소집하고, “안보를 핑계로 인권이 무시되던 제5공화국시대의 대법관을 새 대법원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성명을 냈다.

민변은 “정부가 유신시대와 제5공화국치하에서 사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시국사범재판 등에 부당한 간섭을 일삼는 등 정치권력의 의도에 직접 간접으로 협조해온 허물 있는 인사를 재조 재야법조인들의 압도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동의를 요청한 것은 국민들의 민주화열망을 짓밟고 사법부를 손아귀에 장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폭거”라며, 정기승의 임명을 강력히 비판했다. 민변은 공화당을 향해 “우리는 정기승씨가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동향이고 고교 선후배 사이라는 인연을 고려해 지명한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민주공화당의 태도를 예의주시한다”고 압박했다. 사법연수원생 185명도 7월1일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정기승은 “사법부에 대한 실추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에 미흡”한 인물이라며 그에 대한 임명철회를 주장했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국회에서의 첫 표 대결을 앞두고 총력을 기울여 지지표를 모았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이탈표 방지를 위해 명패와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에 들어가지 말고 바로 투표함으로 가 투표용지는 백지로 넣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캐스팅보트를 쥔 공화당은 의원들의 자유투표에 맡긴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김종필은 “나는 원칙적으로 찬성”이라며 정기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투표함을 열자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재석 295명 중 찬성 141표, 반대 6, 기권 134표, 무효 14표 개표로, 국회동의에 필요한 재석과반수 148표에 7표가 모자라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무효표의 내용이었다. 국회법상 찬반은 ‘가’ 또는 ‘부’로 표시하게 되어있는데, 무효표의 절대다수가 ‘정기승’이라고 이름을 적거나 ‘O’ 또는 ‘찬’이라고 쓴 것이다. 여당의 원내 지도부가 의원들에게 기표 방법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것이 사법부의 새 출발을 앞당긴 것이다.

이일규 체제의 출범

정기승의 임명동의안 부결은 노태우 체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제 새로운 대법원장은 야당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후임으로는 자연히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가 부각되었다.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70년대와 80년대의 사법부에서 이일규는 대법원 판사로 있으면서 송씨 일가 간첩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고, 또 수많은 소수의견을 냄으로서 사법부 안팎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1985년 12월 대법원 판사에서 65살로 정년퇴임했지만, 대법원장의 정년은 70살이었던 까닭에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990년 12월 다시 정년퇴임했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직장에서 두 번 정년퇴임한 사람은 아마도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고 웃었다. 이일규는 대법원장 취임 의사 타진을 위해 온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에게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노태우 정권은 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새로운 대법관의 구성에서 이일규는 종래 대법관 후보를 2배수 대통령에게 제청하여 낙점을 받던 관례를 깨고 대법관 정수 13명만을 제청하여 정치권의 영향력을 차단했다. 그는 5공 들어 2명으로 늘어난 검찰 출신 대법관의 수를 1명으로 줄이고, 5공 시절 대법원 판사 재임명에서 탈락했지만 법원 내의 신망이 두터운 이회창, 김덕주 등을 다시 대법관으로 기용하는 등 재야에서 4명을 발탁했다. 제2차 사법파동은 대법원장의 교체를 가져왔고, 이일규 신임 대법원장은 대꼬챙이라는 별명답게 재판에 대한 외부의 압력을 적극 차단했다. 그러나 이일규 체제의 사법부도 과거청산이나 인적 청산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당시 소장 판사들 사이에서 “정치판사 퇴진!”이라는 요구가 일부 나오기도 했으나, 한인섭 교수의 지적처럼 “다수가 암흑기 재판에 관여한 터라 ‘누가 누구를 나무라는가’ 하는 반격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서명의 주역들이 우리법연구회 조직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이일규 체제의 출범으로 사법부에 대한 외압은 완전히는 아니라 해도 상당히 사라졌다. 그러나 사법부의 불행했던 과거는 결코 외압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사법부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법부 내에서의 자체 반성과 개혁이 필요했다. 최근 수구세력이 법원 내의 ‘하나회’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운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6월의 서명을 주도한 소장 법관들이 주축이 되어 1988년 10월에 탄생했다. 6월 항쟁 직후의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체불임금이나 휴일·야근 근무수당을 제대로 계산해 지급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집단소송이 급증하여 법관들이 노동법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급증했고, 민주화의 분위기에 맞춰 헌법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법연구회는 2차 사법파동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조직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심정적으로 한국 사회와 사법부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법 관료인 법관들이 주축이 된 만큼 활동이나 생각은 재야단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체제 내적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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