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서울 어느 음식점에서 민주화투쟁을 함께한 재야인사들과 자리를 함께한 이병린 변호사. 맨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장공, 함석헌, 이병린. 유신정권은 인권변호사들을 갖가지 죄목으로 엮어 구속·탄압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강신옥 변호사가 구속됐고, 이어 강 변호사를 변호하던 이병린 변호사가 구속됐으며, 다시 이 변호사를 변호하던 한승헌 변호사가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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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옥·한승헌·홍성우·이병린…
접견 제한…업무정지처분까지
변론 문제삼아 중정 끌고가 폭행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51. 변호사에 대한 탄압 (상) 변호인의 접견 제한 중정-안기부는 유죄를 끌어내기 위해 법원·검찰뿐 아니라 변호인들에게도 압력을 행사했다. 변호인들에 대한 압력은 변호인의 접견 거부나 증인에 대한 압력 등 변론권에 대한 침해와 변호인에 대한 징계, 연행과 구속 등 변호인 자신에 대한 탄압 두 경우로 나눌 수 있다. 1980년대 말까지 중정-안기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거나 심지어 구속된 변호인은 이병린, 김종길, 조승각, 강신옥, 한승헌, 임광규, 홍성우, 이돈명, 김성기 등을 비롯하여 여럿이 있으며 그 외에 1973년 개정된 변호사법 제15조 “법무부 장관이 기소당한 변호사의 업무정지를 명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들어 업무정지 처분을 당한 변호사도 이상수, 노무현, 박찬종 등이 있다. 또한 태윤기 변호사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제명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헌법에 보장된 변호인 접견을 금지했던 사례는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88년 이일규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법원은 공안기관의 변호인 접견 금지에 대해 준항고제도나 판결을 통해서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서울형사지법은 화가 홍성담의 간첩 혐의 사건에서 변호인의 접견이 이루어지기 전에 검찰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를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런 입장은 대법원으로 이어졌는데, 민주화 이후 무고한 간첩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법원이 변호인의 접견을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장치로 인정하게 되자 검찰도 점차 이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여전했다. 1992년 김낙중씨가 간첩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안기부 차장보 정형근은 중간수사 발표를 하면서 “김씨를 접견하려는 민변 소속 변호사들은 진정한 변호인이 아니고 ‘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변호사들에게 간첩 용의자를 접견하고 구속적부심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여주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변호인 접견 불허가 비록 실정법에는 어긋나지만 크게 보면 정당하므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조치를 취하겠다”고 당당히 말하기도 했다. 정형근의 이런 발언에 민변은 물론 변협도 비난 성명서 발표와 고소 고발을 제기하며 강력 항의했다. 세상이 그래도 좋아진 탓인지 안기부는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고위 간부들이 변협을 방문하여 사과했고, 정형근도 최종수사 발표 때 카메라를 치우고 공개사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변호인 접견에 대한 제한은 계속되었다. 2006년 11월의 ‘일심회’ 사건의 경우, 조사에 입회했던 장경욱 변호사가 사건과 관련 없는 부당한 질문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권유했다가 국정원 조사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오기까지 했다.
증인 및 참고인에 대한 압력 중정-안기부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증인이나 참고인을 연행하여 겁을 주거나 고문하고 구속하기까지 했다. 송씨 일가 사건의 경우 김재철씨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정 증언을 했다가 위증죄로 구속되어 실형을 살았고, 이밖에 다른 증인들도 안기부의 고문과 협박으로 거짓증언을 해야 했다. 2008년 7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차풍길씨의 경우, 간첩 혐의로 재판받을 때 안기부가 조총련 공작원에게서 받은 물품은 사실은 누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변호인이 일본에 있던 누나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러자 안기부는 일본 주재 파견관에게 ‘간첩 차풍길 연고자 차기순 입국저지 지시’라는 제목의 전문을 보내 결정적인 증인의 입국을 저지시켰다. 역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박동운씨의 경우, 박동운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이 안기부에 끌려갔다 온 뒤 박동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혐의를 입증하는 증인이 되어버렸다. 한명숙 전 총리 등이 구속되었던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의 경우, 구속자 가족들은 구속자들이 정보부에서 고문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종교계 및 재야인사의 서명을 받아 대통령과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중앙정보부는 여기 서명한 천관우, 한승헌, 한완상, 김승훈, 백기완 등 36명을 연행하여 청원서에 서명한 경위와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에 대한 태도들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벌였다. 이들의 수사보고서에는 <주요인물 신상정보>라는 형태로 지난 몇 년간 그들의 발언과 행적에 대한 세세한 자료가 첨부되었다. 중정이 사건 관련자도 참고인도 아닌 탄원서 서명자를 잡아다 조사한 것은 피의자들이 고문당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고와 같은 심정이라는 변호사를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강신옥 변호사는 군법회의에서 변론 중 자신은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와 홍성우 변호사는 휴정 중 옆방으로 불려가 중정 직원의 조사를 받았다. 그날 밤 강신옥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잔뜩 두들겨 맞았다. 한 시간쯤 뒤에 연행된 홍성우 변호사는 다행히 그사이 누군가가 변호사들을 때리지는 말라고 한 탓인지 맞지는 않았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7월15일 법정모욕죄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은 홍성우 변호사는 법리상 사건 구성이 안 되어 그냥 넘어갔다. 아무리 군사법정이라지만 변호사가 법정에서 한 변론내용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다는 것은 일제 때에도 없던 황당한 일이었다. 당시 군법회의법조차 “변호인은 재판에 관한 직무성의 행위로 인해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이병린, 홍성우 등 93명의 대규모 변호인단의 노력에도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1975년 2월 석방된 그는 6월항쟁 이후인 1988년에 가서야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병린ㆍ한승헌 변호사의 구속 유신정권은 강신옥에 이어 그의 변호인 이병린 변호사를 구속했고, 또 이병린의 변호인인 한승헌 변호사를 구속했다. 이병린 변호사는 1964년 6·3사태 당시 대한변협 회장으로서 <인권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배포했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처음 구속되었는데, 현직 변협 회장이 구속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 시절 이병린 변호사는 1972년 8월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부치러 우체국으로 가던 중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8월17일자로 된 <이병린 조사결과 보고> 등의 문서를 확인했다. 이병린 변호사는 석방 이틀 뒤 공동대표직을 사임했다. 국정원에는 1974년 1월20일자 <이병린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라는 문서가 또 남아 있어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자들의 변론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병린 변호사를 잡아다 조사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병린 변호사는 이 이후 한동안 재야인사들과의 접촉을 끊고 칩거했지만,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할 때 임시의장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복귀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으로 맹활약하던 그는 1975년 1월17일 간통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은 서울형사지법에서 비밀영장을 담당하는 수석부장판사에 의해 발부되었다. 이병린 변호사가 구속되자 한승헌 변호사가 구치소로 그를 찾아갔다. 이병린 변호사는 구속되기 전날 중정의 국내정치 담당 부서인 6국의 과장 한 사람이 찾아와 “당신이 간통죄로 피소되었는데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사퇴하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고소 사건을 잘 무마해주겠다”고 하기에 대표위원 사퇴는 절대 있을 수 없으며, 사표를 내도 왜 정보부에 내느냐고 꾸짖어 보낸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사실을 기자들에게 이야기한 한승헌 변호사는 3년 전에 <여성동아>에 쓴 칼럼 ‘어떤 조사’가 간첩으로 처형된 전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을 추모하는 글이라는 명목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한승헌 변호사는 강신옥 변호사가 맡아 하던 여정남의 변호를 맡았었는데,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여정남은 한승헌 변호사가 구속되어 있을 때 끝내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병린 변호사는 이돈명 변호사 등이 고소인인 이모 여인의 남편을 장인을 통해 설득하여 고소를 취하해 구속 23일 만에 풀려났다. 사실상 이혼 상태였던 남편을 찾아내 눈엣가시 같은 이병린 변호사를 얽어매려던 중정이 허를 찔린 것이다. 홍성우 변호사는 유신정권이 염문을 악용해 이병린 변호사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이병린 변호사는 망신을 각오하면서까지 끝내 타협하지 않아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중정은 이병린 변호사가 석방된 후에도 기관원을 배치하여 그의 사무실을 지키게 했으니 사건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1975년 말, 아무 연고가 없는 경북 상주로 내려가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86년 위암으로 별세했다. 국회의원 출신 X변호사에 대한 미행감시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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