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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09 22:58 수정 : 2010.05.09 22:58

성매매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대표자 57명이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최근 불거진 검찰의 스폰서 범죄와 관련한 성매매 의혹 검사에 대한 엄정 수사, 처벌’을 요구하는 고발장을 내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경찰·안기부 뒤치다꺼리 하다
노태우 시절 공안 정국 전면에
DJ·노무현 검찰 장악·개혁 시도
‘인적 청산과 반성’ 없어 실패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50. 민주화와 검찰공화국의 탄생

검찰이 조롱받는 나라

검찰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의 시끄러운 일을 검찰이 나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문제를 일으킨다. 공익의 대표자로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찰이 정치적 사건의 무리한 기소로 물의를 일으키더니, 이제 범죄 수준의 스캔들로 손가락질받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은 민주화 이후 시녀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로 등장했다. 민주화로 안기부와 군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청와대의 권력은 임기라는 덫에 걸려 힘이 약해진 반면, 검찰은 삼성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으로 부상했다. 최근의 스폰서 추문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과거 안기부가 기세등등하던 시절에는 검찰이 보기 흉하게 찌그러졌어도 이렇게까지 썩지는 않았다. 외부의 견제와 감시가 일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민주화로 큰 권한을 누리게 된 뒤, 검찰은 자정기능을 수립하지 못했고, 민주정권은 검찰개혁에도 문민통제에도 모두 실패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검찰이 보여주는 추한 모습이다.

역대 정권의 검찰 길들이기

이승만의 최대의 권력기반은 친일경찰이었다.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검거되었는데, 수도경찰청장 김태선이 관용차로 노덕술을 도피시키고, 경호경관까지 붙여준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총장 김익진은 김태선을 범인은닉 혐의로 수사하라는 엄정한 지시를 내리자, 경찰은 이승만에게 떼를 써 검찰총장 김익진을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검찰총장에서 고검장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참고 버티던 김익진을 1952년, 그의 먼 친척인 의열단원 김시현이 주도한 이승만 저격 계획에 얽어 구속시켜버렸다. 이보다 앞서 1948년 10월 25일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가 여순사건의 와중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은 박 검사가 반란군의 처형을 모면했고, 토벌 중 민간인을 살해한 경찰에게 중형을 구형했다고 그를 총살한 것이다.


5·16 군사반란 직후 4월혁명 이후 특별검찰부를 이끌어 온 김용식 부장 이하 특검 검찰관 18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모두 구속되었다. 이들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유는 김용식 부장이 앞으로의 특검의 방향을 묻는 군인들에게 법대로 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특검을 새로 만들어 입맛대로 사건을 처리했다. 제천지청장이던 황천수 검사는 5·16 후 특무대원이 찾아왔을 때 앉으라는 말을 안 한 데 앙심을 품은 특무대원에 의해 뇌물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5·16 후의 특검과 1974년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사건을 일반검찰이 아닌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맡겨 처리하게 한 것은 제도적으로 검찰권을 유린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사건의 처리에서 검찰을 권력에 완전히 복속시켰지만, 오랜 검·경 갈등에서는 대체로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정희는 현직 검사인 한옥신을 경찰총수인 치안국장에 임명했고, 31살의 검사 이건개를 서울시경국장에 임명하여 경찰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검찰이 10·26사건으로 입지가 약해진 안기부와 힘을 겨뤄보려다가 큰 곤욕을 치렀고 때로 경찰에 밀리기도 했다. 앞서 살펴본 대법원장 비서실장 뇌물사건 당시 검사 두 명이 구속되고 서울지검장과 남부지청장이 옷을 벗었으며, 안보수사조정권과 관련해 구상진 검사도 사표를 썼다. 검찰의 치욕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처리에서 절정에 달했다. 군사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수만명의 전투경찰과 엄청난 수의 정보요원을 가진 경찰력에 크게 의존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무렵에는 경찰이 검찰의 힘을 압도하고 검찰을 우습게 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검찰 내부에는 “위기감과 함께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은 안기부나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사체 부검을 실시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검찰 지휘부와 담당 검사 안상수는 경찰과 안기부가 주도한 은폐조작을 적극 수용했다.

검찰공화국이 낳은 추문

노태우 정권 시절은 검찰 출신들의 전성기였다. 5공 시절부터 정치검사와 정치군인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육법당’이라고 비꼬았는데, 6월항쟁으로 군 출신들이 누리던 권력을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안기부장 서동권, 청와대 비서실장 정해창 등 경북고를 나온 검찰 출신들이 차지했다.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이라 할 1991년의 유서대필 사건은 바로 이런 구도 아래서 발생했다. 과거에는 정권 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 유서대필 사건은 이례적으로 서울지검 공안부가 아니라 강력부에서 수사하였는데, 부장 강신욱 역시 경북고 출신이었다. 서동권에 앞서 검찰 출신인 배명인도 안기부장을 지냈으니, 안기부에 눌려온 검찰로서는 톡톡히 자존심 회복을 했다 할 것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는 광주학살의 책임자들과 손을 잡아 대통령이 된 김영삼의 입장을 반영한 것인데,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검찰은 지난번 수사는 ‘나가리’라며 재수사에 착수해,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기소했다.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문다”는 검찰의 정체성 고백은 바로 이때 나온 것이다.

최초의 정권교체로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호남 출신을 중용해 검찰을 장악해보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99년에는 대검 공안부장 진형구가 조폐공사 파업을 검찰이 유도한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자랑했다가 구속되었고, 또 검찰총장을 거쳐 법무장관이 된 김태정의 부인이 재벌 회장 부인으로부터 ‘옷로비’를 받았다는 주장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5공화국 이래 검찰에서는 공안검사들이 성골로 통했는데, 민주화 이후 대형 국가보안법 사건이 거의 사라지자, 공안검사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와 단속을 새로운 일감으로 삼았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은 이 과정에서 진형구가 기자들과 폭탄주를 돌리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다가 나온 것이다. 이 두 사건으로 두 개의 특검이 동시에 출범했지만, 아쉽게도 김대중 정권은 이 두 사건을 검찰개혁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

검찰개혁 실패가 자초한 노무현의 죽음

검찰에 구속된 바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개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법무부의 문민화를 꾀해 검사 출신이 아닌 강금실과 천정배를 법무장관에 임명하는 실험을 했다. 40대 여성 강금실의 임명은 검찰의 집단적 반발을 가져와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천정배 장관 시절에도 강정구 교수의 구속 문제를 둘러싸고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으로 검찰총장이 사임하는 등 검찰과 정권의 갈등은 노무현 정권 내내 지속되었다.

검찰개혁을 위해서는 정치검찰과 부패검찰에 대한 인적 청산,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는 과거청산, 그리고 막강한 검찰권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인다면, 대통령도 검찰을 정치적 도구로 악용하지 말고 검찰의 독립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을 통한 검찰에 대한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검찰 출신이 아닌 문재인, 전해철, 이호철 등을 민정수석에 임명했고, 실제로 그의 지지자들이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을 때 전화 한통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름 훌륭한 태도였지만, 인적 청산, 과거청산, 제도개혁이 수반되지 않고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인적 청산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국정원, 국방부, 경찰 등 다른 권력기관은 자체적인 과거청산을 했지만 검찰은 꿈쩍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은 검찰의 조폭 문화, 떼거리 문화의 법적인 원천으로 전락한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검찰청법에서 삭제하고,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등 제도개혁 분야에서 아주 작은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차관급인 검사장 자리를 크게 늘려주었을 뿐, 검찰의 기소독점권에 대한 핵심적인 견제장치에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공수처)’ 설치는 무산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적 청산, 과거청산, 제도개혁 등 세 가지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검찰 독립만 존중한다고 하다가 못된 검찰의 힘은 키워주고 검찰에게 당해 벼랑 끝에서 떨어진 것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이명박 정권은 촛불위기를 검찰, 경찰의 공안권력을 통해 돌파했다. 피디(PD)수첩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반대하다 임수빈 부장검사는 사표를 써야 했다. 옷 벗는 자리라는 수원지검장 시절 원정화 간첩 사건을 처리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한 천성관은 피디수첩 수사의 공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가 스폰서 문제로 낙마했다. 피디수첩이 밝힌 스폰서 검찰의 추악한 사례로 처음 등장한 자는 대검 감찰부장 한승철이었다. 검찰의 자정능력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면, 정말 좋아진 것은 재벌과 검찰이었다. 과거에는 독재자가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을 상호 견제시키고, 재벌의 힘도 상당히 통제했다.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공화국 대신 삼성공화국, 검찰공화국을 불러왔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단속해야 할 검찰은 재벌에 의해 관리되는 ‘떡찰’이 된 지 오래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 삼성과 검찰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검찰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의 존망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에 포도청을 좌포청과 우포청으로 쪼갰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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